옛날얘기 썸네일형 리스트형 '네'하고 일어설 준비.. 유서 1. 혼자 사시는 여든 다섯의 한 할머니, 매일 저녁 목욕을 하고 깨끗한 내의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드신단다. 언제 갈지 모르는데, 사람들에게 흉잡히지 않으려 그리 하신단다. 머리맡 문갑엔 현금 만불도 늘 넣어두신단다. 당신의 장례비용이란다. 2. 우리의 삶은 사실 죽음 쪽에서 보면 그저 조금씩 ‘죽어 오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법정스님은 ‘죽음이 언제 어디서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어야한다’고 했었다. 3. 예전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아버지 방 청소를 하다가 펼쳐본 아버지의 다이어리, 그 한 페이지에 적혀있던 글.. ‘나 죽으면 화장해라’ 감전이라도 된 듯 머리 속이 하얘졌다. 당시 아버진 오래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액자에 넣어 그걸 머리맡에 두고.. 더보기 25년전 심은선 덕에 맥주를 마신 줄 알았더니 두번째 휴가였을거다. 짭짤한 아르바이트가 하나 있으니 같이 하잔다. 송규호다. 도대체 무슨 아르바이트길래 휴가 나온 군인에게 하라는 걸까? ‘가서 한시간쯤 하면 이만원 받는다’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하겠다고 했다. 이만원이면 생맥주 500cc 마흔 잔 값이다. ‘근데 뭐하는 건데?’ 라디오 교육방송에서 하는 어린이 영어프로그램에 가서 피아노 반주를 하는 거란다. 원래 82 심은선양과 같이 하던 일인데, 그 아이가 이번주에 못나와서 내가 땜빵을 하는 거란다. 고맙다 심은선. 덕에 술값 벌게 생겼다. 근데 피아노 반주라.. 기타라면 모를까 내 피아노 실력은 방송에 나가서 반주할 실력이 전혀 아니다. 하지만 돈 이만원에 이미 내 마음은 굳었다. ‘악보는 있지?’ 악보는 준댄다. 그럼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 더보기 83년 5월 중공 민항기 사건, 전쟁터에서의 십분 짐승같았던 고참들과 떨어질 수 있는 유일한 곳, 교회. (요즈음 사진인 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그 전선교회와는 정경이 완전히 다르다. 그 전선교회 옆엔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 똑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백골전선교회'인 것 같다.) 중대막사로 부터 걸어서 이삼십분쯤 거리에 '전선교회'라는 곳이 있었다. DMZ 통문 바로 앞에 있었는데, 이게 남한 최북단 군인교회라고 했었다. 난 일요일마다 난 '종교집합'소리에 맞춰 튀어나가 이 교회에 열심히 나가던 독실한 병사였었는데, 그곳에 가면 잠시나마 피아노 소리도 듣고, 노래(찬송가)도 부르고, 군종병이 주는 칡차도 마시면서 부드러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83년 어느 늦은 봄날, 그날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난 종교활동을 빙자해서 전선교회에서 노.. 더보기 이전 1 ··· 3 4 5 6 7 8 9 ··· 2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