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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네'하고 일어설 준비.. 유서

1.
혼자 사시는 여든 다섯의 한 할머니, 매일 저녁 목욕을 하고 깨끗한 내의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드신단다. 언제 갈지 모르는데, 사람들에게 흉잡히지 않으려 그리 하신단다. 머리맡 문갑엔 현금 만불도 늘 넣어두신단다. 당신의 장례비용이란다. 


2.
우리의 삶은 사실 죽음 쪽에서 보면 그저 조금씩 ‘죽어 오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법정스님은 ‘죽음이 언제 어디서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어야한다’고 했었다.


3.
예전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아버지 방 청소를 하다가 펼쳐본 아버지의 다이어리, 그 한 페이지에 적혀있던 글.. ‘나 죽으면 화장해라’

감전이라도 된 듯 머리 속이 하얘졌다. 당시 아버진 오래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액자에 넣어 그걸 머리맡에 두고 계셨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그렇게 어머니를 만난다는 그리움으로 감당하시는 듯 했다. ‘네’하고 일어설 준비를 하고 계신 거였다.


4.
누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가 미리 유서를 써놓으셨어’ 얼마전 인공호흡기 할머니 사건을 보시곤 자식들한테 부담줘선 안되겠다고, 그래서 그 내용을 쓴거란다. 절대로 병원에서 연명치료같은 건 하지 말라고. 울컥했다. 눈물이 핑 돌면서 가슴이 조여왔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건강하신 양반이 그런 걸 왜..’ 대수롭지 않은 듯 화제를 돌렸다. 엄마께 바로 전화를 해선 다른 얘기만 잔뜩 하다 끊었다. 그렇게 왁자지껄 한담을 나누면 가슴이 풀릴 줄 알았는데 엄마 목소리를 듣고나니 가슴이 더 조여왔다. 천하의 우리엄마도 혼자 사시면서 느끼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자식들이 주변에 없는 시간에 갑자기 가실 수도 있다는 생각.

시간이 꽤 흘렀다. 근데 먹먹한 가슴이 여전히 가시질 않는다. 우리 엄마가 ‘네’하고 일어설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 엄만 아직 이렇게 젊고 예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