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같았던 고참들과 떨어질 수 있는 유일한 곳, 교회.
(요즈음 사진인 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그 전선교회와는 정경이 완전히 다르다. 그 전선교회 옆엔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 똑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백골전선교회'인 것 같다.)
중대막사로 부터 걸어서 이삼십분쯤 거리에 '전선교회'라는 곳이 있었다. DMZ 통문 바로 앞에 있었는데, 이게 남한 최북단 군인교회라고 했었다. 난 일요일마다 난 '종교집합'소리에 맞춰 튀어나가 이 교회에 열심히 나가던 독실한 병사였었는데, 그곳에 가면 잠시나마 피아노 소리도 듣고, 노래(찬송가)도 부르고, 군종병이 주는 칡차도 마시면서 부드러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83년 어느 늦은 봄날, 그날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난 종교활동을 빙자해서 전선교회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더니 대대 준위가 교회안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서울이 공습받고 있다. 빨리 복귀해라'
갑작스런 소리에 다들 어안을 벙벙해 하는데 군종병이 용감하게 되물었다.
'공습을 받고 있다뇨?'
'공습도 몰라 이섹꺄. 전쟁 터졌다니까.'
그러니까 저 영감 얘긴.. 서울이 지금 북한군의 공습을 받고 있다는거 아닌가? 진짜로 전쟁? 아! 그렇다면 우리 엄마 아버지 누나들 친구들은 어떡하나.. 하지만 이런 기특한 걱정도 잠시.. 아주 싸가지 없는 생각이 맨위로 밀고 올라왔다.
'에이 띠바.. 왜 하필 내가 군대있을때 전쟁이.. 띠바'
일단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에 가슴이 터져나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던 거다. 대신 머리속엔 TV에서 보던 전쟁 드라마 '전우'의 전투장면들이 가득했다. 그 드라마의 주제곡 '우리 간~다. 하늘도~ 부른다. 피끓는 용사들도 전선을 간다~' 포탄이 쏟아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 그 속을 뚫고 뛰어댕기는 나. 폼 난다..
이 황당한 상상은 옆에서 뛰던 동기놈의 입에서 튀어 나온 한마디로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 전부 총알받이로 죽는거다'
다들 그놈의 얼굴을 쏘아봤다. '띠바시키 재수없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총알받이라니?'
'기억안나? 전쟁 나면 후방에서 전투준비 할 수 있게 우리가 시간 벌어줘야 한댔자너' 그렇다. 정신교육 시간에 그런 얘기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설마 지금이 때가 어느땐데 군인들이 총알받이로.. 근데 잠깐 생각해보니 진짜로 그럴 수밖에 없겠다. 우리에겐 무기가 너무 없었던 거다. 북쪽애들은 탱크를 앞세우고 내려올텐데 우린 뭐가 있나. 수색매복때 가지고 댕기던 엠십육 소충과 실탄 105발, 수류탄 두개, 크레모아 두발, 엠육공 기관총 서너대.. 이거밖에 더 있나. 우리.. 총알받이 맞는거 같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며 북받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던 거다. '아 띠바 꽃다운 나이에 이렇게 가는거구나.. 아 아.. 너무 억울하다. 이렇게 일찍 죽기는. 아직은 좀 더 살아야 하는데..
금새라도 하늘에서 전투기들이 굉음을 내며 날아 올 것 같다. 금새라도 탱크부대의 육중한 소리가 들릴 것 같다. 금새라도 주변에 포탄이 쏟아질 것 같다. 금새라도 북쪽에서 북한군들이 밀려 내려올 것 같다. 아 띠바 아 띠바.. 이게 아닌데..이게 아닌데.. 엄마 엄마.. 나 먼저 가요.. 효도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친구들아 나 먼저 간다.. 니들은 오래오래 살아라.. 이렇게 일찍 갈줄 알았더라면 살아있는 동안 착하게 사는건데.. 후회된다.'
날라리 소대장을 믿고, 무대뽀 중대장을 믿고, 물러터진 대대장을 믿고 우리가 전쟁터에 나가야 한단다. 전쟁경험 있는 놈 하나도 없지 않은가. 허둥지둥대다가 모두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다. 소총 한자루 달랑 들고 나갔다가 벌집이 되어서 죽을 거 같다. 아 띠바 아 띠바.. 개쎽히들 하필이면 지금 전쟁을 벌이고 지랄이야.
한참 뛰다보니 부대 연병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근데 이상하다. 전쟁준비로 한창일 줄 알았던 연병장에 아무도 없다. 전쟁이 터졌으니 당연히 병사들이 완전군장으로 출동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근데 연병장이 텅 비어있다. '어? 이 띠바들 벌써 전부 어디로 간건가? 아니면 혹시 벌써 다.. 죽었나?'
궁금함에 속이 바짝바짝 탄다. 연병장 옆 고갯길을 뛰어오르다 보니 멀리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놈이 하나 보인다. '어 저거 뭐야? 얘네들 아직도 전쟁난 걸 모르는거야?'
우당탕탕 내무반으로 뛰어 들어갔다. 급하게 뛰어든 우릴 보고 침상에 자빠져 있던 고참들이 배를 잡고 웃는다. '많이 놀랬냐? ㅋㅋ 허긴 존나게 놀랬겠다.' 아니 이 띠바들이 지금 모하는 걸까.. '웃지들 말어. 쟈들 을매나 놀랬겄냐..전쟁난 줄 알고 다들 조시 빠져있을 거 아녀'
아 다행이다. 전쟁 아니다.
중공 민항기였었다고 하는데, 그 해프닝이 있었던 그 날.
전선교회에서 부대막사까지 뛰는 그 동안, 외부와 연락이 완전 두절되었었던 그 십여분간, 우린 실제로 전쟁이 난줄 알았었고, 똥줄을 태우며 전쟁터 언저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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