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얘기

덕산제과 왕돌이 소문

아마 ‘앤초비’아니면 ‘상수’ 둘중의 하나였을거다. 뭐 대단한거라도 가지고 왔는지 보여줄게 있다며 쉬는시간 운동장 구석으로 가잰다. 여남은 명이 잔뜩 기대를 하고 운동장 구석에 모였다. 누가 보면 큰일나니 주변을 잘 살피란다. 그래서 우린 마치 첩보원들같은 표정으로 주변에 선생님들은 없는지, 궁금하다고 모여드는 아이들은 없는지를 확인했다. 아무도 없다.. 비밀의 보물을 처음 확인하는 심정으로 시선을 모았는데.. 그놈이 꺼낸 건 과자였다. 한눈에 보아도 불량식품인 것이 확연한 과자.

‘씹새꺄 이게 뭐야?’ 기껏 이 따위 과자봉지 하나 보여줄라고 그 요란을 떤거냐? 그러나 그놈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 ‘니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이거 굉장히 무서운 거야’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이 과자의 사진이 있었다. 어떤 낚시꾼이 낚시하다 우연히 건져올렸다는.. 근데 윗부분이 찢겨져 과자이름은 모르고, 그냥 74년도 10원짜리 과자라 신기해서 인터넷에 올렸다는 사진. 바로 덕산제과 왕돌이였다.)

과자이름 ‘왕돌이’..
바로 격하면 긴다’ 의 준말이라는, 여기서 왕은 김일성을 의미한댄다. 우끼지 마.. 근데 진짜란다. 덕산제과의 덕산이 바로 김일성이 태어난 곳이란다. 뭐? 덕산이 김일성 태어난 곳? (물론 아니다) 어어 이거봐라.. 슬슬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전체 그림 윤곽이 뭐랑 비슷한지 잘 보란다. 근데 암만봐도 모르겠다. ‘잘봐.. 이거 우리나라 지도야’ 말을 듣고서 보니 진짜 전체 윤곽이 우리나라 지도처럼 생기긴 했다. 그제서야 눈들이 반짝반짝해졌다.

그럼 이거 뭐야? 북한에서 만든 과자? 어쩐지 불량식품처럼 생겼더라니 이거 북한과자구나.. 근데 이런거 갖고 있어도 되나? 잡혀간다던데..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놈의 입에서 이어져 나온 더 무시무시한 설명.. 이건 북한의 과자가 아니라 북한간첩들이 남한에다 세운 회사의 과자란다. 이 회사의 이 과자엔 김일성의 중요한 지령이 담겨있다는데..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

이 남자는 북한군의 조종사인데. 가슴 옷깃이 아래로 화살표처럼 향해져 있는건 바로 '남침'을 의미하는 거란다. 그리고 그 밑 허리띠의 바클은 '삼팔선 땅굴'을 의미하는 거고.. 즉 땅굴을 통해서 괴뢰군이 진격해 내려온다는 것이다. 이 남자의 오른발은 그렇게 남한을 짓밟아버릴거라는 뜻이고, 공산당의 승리를 뜻하는 브이자를 왼손으로 표시하고 있는 거란다. 즉, 왕(김일성)이 남침해서 이긴다. 어..어.. 진짜네…

다들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누가 우릴 보고있는 건 아닌지. 북한과 관련된 걸 보거나 얘기를 하다간 잡혀간다는 걸 들은적이 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아니 이거 괴뢰군이 곧 쳐들어온다는 뜻 아닌가. 그렇다면 이걸 빨리 어른들에게 알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근데 그런 걱정 안해도 된댄다. 다행히 우리나라가 이미 그걸 알고 있댄다. 그래서 곧 군인들이 그 덕산제과를 덮쳐서 간첩일당을 소탕하고 괴뢰군의 남침을 막을 거란다. 그래? 그러면 정말 다행이고.. 아- 근데 북한괴뢰군은 정말 무서운 놈들이다. 마자마자..

---

반공방첩의 애국주의가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었던 시절. 계절마다 반공 웅변대회, 반공 글짓기 대회, 반공 포스터 그리기대회가 있었던 시절. 말 한번 잘못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간다고 듣던 시절, 바로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 유신헌법이 막 생겨났었던 35년전쯤의 일이다.


어제 동가에게 들은 미네르바가 누군지 보러 갔다가 문근영사건이란 걸 보게 되었다. 눈을 의심하고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었다. 문근영의 선행이 사실은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네.. 그런 주장을 펼치는 놈이 있는 것도 놀라운데, 그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는데에 더 놀랐다.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이건 실제로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인터넷에다가 싫은 소리좀 했다고 정부기관이 그에게 압력을 가하고.. 그러자 그 사람은 대한민국을 가슴에서 지운다며 절필을 선언하고, 남몰래 기부를 해오던 여자탤런트가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게 다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고.. 그에 대해 많은 사람이 빨갱이는 역시 무섭다고 동조를 하고.. 

올해안에 주가 3000 간다고 큰소리쳐서 많은 사람들 재산 반토막 만든 놈은 괜찮고, 경기전망 어둡게 보는 인터넷 논객은 범죄요건이 되는지 검토하겠다고 하고.. 전재산 기부하겠다고 해놓고 아직까지 뭉기적대며 내놓지 않는 놈은 괜찮고, 버는 만큼 몰래몰래 기부를 해왔던 어린 여자 탤런트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있는거라 하고.. 

2008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이라고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이 참담한 현실. 대한민국이 35년전으로 돌아간 게 아닌지 의아해지다 문득 35년전 덕산제과 왕돌이가 떠오르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