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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자전거 그리고 통일로의 코스모스

갈현동 길거리의 한 자전거 가게에서 자전거를 빌려줬었습니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자전거를 빌려서 통일로로 싸이클링을 많이 나간답니다. 어릴적 석관동에서 한시간에 오십원 자전거를 빌려타던 이후, 서울에서 자전거 빌려주는 곳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어느 가을의 조용한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자전거를 빌렸습니다. 통일로를 한번 달려보자.. 자전거로 타고 넘기엔 다소 뻑뻑한 박석고개를 넘어 내리막을 기분좋게 달려 내려가면 구파발 삼거리가 나오는데 왼쪽방향이 원당쪽, 오른쪽 방향이 삼천사와 의정부로 가는 길입니다. 원당방향 길로 오분쯤 달리면 검문소가 있는 삼거리가 또 나오는데 왼쪽이 원당, 오른쪽이 통일로입니다. 


검문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옆으로 숲이 빽빽한 작은 고개를 하나 넘으면 갑자기 주변 경치가 확 바뀝니다.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애매한 풍경에서 갑자기 완전한 시골풍경으로..  이 느낌이 얼마나 달랐냐하면, 마치 영화에 나오듯 신비의 문을 통과했더니 갑자기 완전히 다른 곳으로 순간이동을 한 듯한 착각이 들게 할 정도였었습니다.

왼쪽엔 길을 따라 널찍한 개울이 계속 이어지고 오른쪽으론 논과 밭, 가끔 메추리 농장, 과수원들, 풀과 나무와 들과 산들. 싸늘하던 공기는 어느새 기분좋은 시원한 공기로 변해가고, 내리쬐는 햇볕도 따뜻하게 느껴지던 가을 아침.. 잠시 쉬려 한적한 곳 나무 그늘로 접어드니 그 나무가 바로 미류나무, 저 나무가 바로 느티나무.. 그리고 주변에 널리고 널린 코스모스.

당시 통일로 변엔 거의 한치의 빈틈도 없이 코스모스들이 서있었습니다. 일부러 사람들이 심어놓은 것 같지는 않고 그냥 거기에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전까지는 ‘무슨 꽃 좋아하세요?’ 하면 ‘남자가 띠바 꽃은..’ 이랬었는데, 그때 통일로변의 코스모스들을 보고는 앞으로 ‘좋아하는 꽃=코스모스’로 하기로 마음 먹었었습니다. 정신이 극도로 삭막했던 그 무렵 ‘꽃 참 예쁘다’라는 희한한 생각을 하게 했던 꽃. 그랬었습니다. 그 꽃은 정말 예뻤습니다. 난 그 꽃에 깊이 취했었습니다.


가을 녘 아침의 통일로엔 자동차래야 이삼분에 한두대 남짓.. 아무곳에서나 자전거를 세워도 괜찮았습니다. 그렇게 달리다 쉬다 달리다 쉬다.. 길가 식당에서 느긋하게 점심도 먹고. 까짓거 통일로 끝까지 한번 가볼까나. 그러나 오후가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좀 든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쯤 서울로 방향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올때완 많이 달랐습니다. 시원 상큼한 아침도 아니고, 햇볕도 은근히 따갑고, 경치도 아까 오면서 봤던 그 경치들.. 오랜만에 자전거를 너무 오래 타서 그런지 다리도 시립니다. 꾀가 났습니다. 그래.. 트럭에 자전거를 싣고 가자. 힘도 안들고 트럭타면 나름대로 재미도 있을거고.. 그래서 지나가는 트럭들에 무작정 손을 들어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여대 트럭이 그냥 못본체 지나간 후, 한 트럭이 고맙게도 서줬습니다. '힘들어서 그래요? 네! 아저씨 감사함다. 어디까지 가요? 갈현동까지 가는데요. 어 난 갈현동쪽으로 안 가는데. 아니 그냥 중간에 아무데서나 내려주시면 됨다. 그럼 타슈..' 이렇게 트럭을 탔습니다. 자전거는 짐칸에 싣고. 


트럭.. 참 빠릅니다. 아까 그렇게 오래 걸려서 왔던 길을 자동차는 이렇게 금세 갑니다. 트럭에 편하게 앉아 있으니 피곤과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몽롱해 있는 찰나, '갈현동 갈거면 여기서 내려야 돼요. 아저씬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난 공항쪽으로 가요. 그럼 한강 근처에서 내려주시면 안될까요. 갈현동으로 가야한다믄서? 괜찮아요 한강에서부터 가면 됨다. 그래? 좀 멀텐데..' 노곤한 몸에 내리긴 싫어서 그냥 더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실수였습니다.

트럭이 방향을 틀고 달립니다. 공항쪽으로 가다가 한강다리를 만나면 거기서 바로 내리고, 거기에서 갈현동까지는 얼마 멀지 않은 거리인 줄 알았었습니다. 언젠가 늦은 밤에 택시로 한강다리를 건너 갈현동까지 금새왔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생각보다 한참을 달립니다. 띠바 아까 거기서 내릴걸.. 후회가 슬슬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앞유리창으로 생소한 다리 하나가 보였습니다. 


행주교, 그때 난생 처음 행주교를 봤습니다. 아주 비좁은 2차선 다리. 아니 이렇게 쪼그만 한강다리가 다 있었네.. 그 행주교 보느라 정신이 팔려 트럭 세워달라는 말을 못했습니다. 엉겁결에 행주교에 이미 올라있었습니다. 난생 처음보는 행주교의 오른쪽 경치, 저기가 어딘가 싶습니다. 서울의 서쪽 끝부분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티비나 시골에서 보던 그런 강가의 모습. 그렇게 넋이 빠져있는데 어느새 다리를 다 건너버렸습니다. '학생, 공항에서 갈현동은 너무 멀어. 그만 여기서 내리지. 근데 아저씨, 저 여기서는 길 못 찾아가는데요. 공항에서부터거나 성산대교에서부터만 길을 알아요. 우씨 한참 돌아야 하는데' 결국 고마우신 아저씬 성산대교 근처로 가서 내려줬습니다.


성산대교 남단에서 갈현동까지의 길. 까짓거 한시간정도면 갈줄 알았습니다. 때는 이미 이른 퇴근시간까지 슬슬 겹치기 시작하는 저녁. 복잡한 성산대교를 건너 갈현동까지 가는 그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시내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아예 없었던 시절이라 쳐다보는 시민들의 눈길도 불편했고, 자전거가 도로에 있는 걸 못마땅해 하던 자동차 운전자들의 시선은 더더욱 거북했었습니다. 그 속에서 매연을 마시며 자동차와 함께 도로를 달린다는 건 보통 일은 아니었습니다. 


무려 서너시간 후 늦은 저녁, 녹초가 되어 갈현동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자전거 가게는 아직 문이 열려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무슨 사고라도 있었던 거예요? 아뇨. 아주 재밌었어요.' 


이게 뭐가 재밌었을까 싶겠지만.. 내겐 평생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지금 이 무렵이었습니다. 

코스모스라는 꽃 하나가 가슴에 푹 박힌 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