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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25년전 심은선 덕에 맥주를 마신 줄 알았더니

두번째 휴가였을거다. 짭짤한 아르바이트가 하나 있으니 같이 하잔다. 송규호다. 도대체 무슨 아르바이트길래 휴가 나온 군인에게 하라는 걸까? ‘가서 한시간쯤 하면 이만원 받는다’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하겠다고 했다. 이만원이면 생맥주 500cc 마흔 잔 값이다. ‘근데 뭐하는 건데?’ 라디오 교육방송에서 하는 어린이 영어프로그램에 가서 피아노 반주를 하는 거란다. 원래 82 심은선양과 같이 하던 일인데, 그 아이가 이번주에 못나와서 내가 땜빵을 하는 거란다. 고맙다 심은선. 덕에 술값 벌게 생겼다.

근데 피아노 반주라.. 기타라면 모를까 내 피아노 실력은 방송에 나가서 반주할 실력이 전혀 아니다. 하지만 돈 이만원에 이미 내 마음은 굳었다. ‘악보는 있지?’ 악보는 준댄다. 그럼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 이삼십분 연습하고 가면 되겠네..

다음 날 규호가 악보를 가져왔다. ‘런던 브릿지 이즈 폴링 다운..’ 그리고 ‘아유 슬리핑 아유 슬리핑..’ 이 두곡이었다. 그런데 내가 기대하던 반주용 악보가 아니다. 멜로디와 가사만 적혀있는 악보다. 그렇다면 소위 ‘편곡’을 내가 해야 한다. 아 일이 좀 커졌다. 금쪽같은 휴가를 동요 반주편곡에 뺏기게 생겼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못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하니브로 서클룸에 있던 피아노에 일단 앉았다. 동요의 반주를 과연 어떻게 만들 것이냐.. 멜로디는 반드시 쳐줘야 한다는데.. 그렇다면 왼손은 그냥 ‘도솔미솔’? 하지만 이건 너무 유치하다다. 그렇다고 반주편곡의 경험이 없던 내게 다른 뾰족한 방법도 떠오르지도 않는다. 결국 도솔미솔을 기본으로 코드가 바뀌는 부분에서 베이스 러닝만 약간 줬었던 거 같다.  

드디어 당일, 방송국으로 갔다. 난생 처음 와보는 방송국, 처음이라 어색한데 신분이 군인이라 더 어색하다. 몇번 와봤던 송규호는 아주 익숙하다. 스튜디오에서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여자 교수님과 인사를 했는데, 반주하겠다며 나타난 게 군인인 걸 보고 흠칫 놀라는 교수님의 눈빛.. 무시하고 아무튼 시작했다. 송규호 기타치면서 교수님과 노래하고, 난 구석에서 피아노 치고.

첫곡이 끝났다. 교수님이 뭐라고 말 할지 바짝 긴장했다. ‘어머.. 군인 아저씨 터치가 어쩜 그렇게 부드러워요?’ 그냥 하는 소리인 건 알지만 일단 교수님이 실망은 하지 않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두번째 곡 아유 슬리핑.. 왼손 반주가 도솔미솔 패턴이 아니라 더 고생했었던 곡이다. 암튼 두곡을 다 무사히 마쳤다.

궁금한 건 오직 돈 ㅎㅎ ‘돈은 지금 바로 주냐? 아님 나중에 주냐?’ ‘잠깐 기다리래. 지금 바로 줄건가봐’ 그렇게 받은 돈이 두사람 몫으로 아마 오만원쯤이었던 것 같다. 아주 명랑하게 교수님에게 인사를 하고 방송국을 나왔다. '꽁돈도 생겼는데 어디가서 찐하게 한잔 빨아야지.' 송규호랑 나랑 단 둘이다. 송규호에게 궁금한 게 있었던 차였는데 잘됐다. 이번 기회에 물어봐야겠다.

‘야.. 김태원이 도대체 어떻게 된거냐?’

모두가 궁금해하던 것이었는데 아무도 내용을 모른단다. 워낙 송규호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그날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슬슬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궁금하던 김태원 스토리. 얘기를 듣던 내가 분을 못 참고 울그락 불그락.. 이문규 xxx, 김태원 xxx.. 그러자 송규호가 질겁을 한다. ‘거봐. 너 이럴거 같아서 내가 얘기 안했던 건데.. 내가 보낸거야. 걘 잘못 하나도 없어. 진짜야. 니가 흥분할 일이 아냐’ 워낙 단호하게 말하는 바람에 그냥 그렇게 결론지어졌다. 여자는 곁에 있겠다는데 송규호가 여자의 행복을 위해 떠밀어 보낸걸로.. 아무튼 그날 심은선양 덕분에 송규호로부터 김태원 얘기도 듣고, 좋은 안주 놓고 생맥주 잘 마셨었다. 고마웠다. 심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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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5년쯤 후, 엊그제. 시카고에 살고 있던 심은선양과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다. 통화 말미에 오래전 이 얘길 했더니, 심은선양 왈.. ‘어? 그거 나 아닌데요’ ^^ 

그럼 도대체 누구였어? ㅋㅋ
누구였든, 심은선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