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육식숭배라는 주제로 쓴 글들이 다소 편파적이고 과격한 면이 없지 않음을 인정한다. 과학적 근거가 불충분한 사안에 대해 다분히 연역적 관점에서 주장만을 했었을 수도 있고, 여기저기서 인용한 수치들중 상당수가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을 수도 있고, 그에 따른 환경영향들을 얘기하면서 그것을 방지하는 노력은 없을 것으로 가정하고 이 상태로 계속 악화만 될 것이라는 전제로 결과들이 과대하게 나쁜 방향으로 부풀려졌을 수도 있다.
숭배에 대한 경계
내가 세상에서 제일 경계하는 것은 崇拜다. 대상이 뭐가 되었든 무언가를 비이성적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을 가장 경계한다. 숭배라는 것은 이성적 판단이 완전 배제된 맹목적 추종과 복종이다. 미개한 숭배는 자기 자신에게는 물론 사회전체에도 해악을 끼치는 죄악이다. 종교에서의 숭배를 가장 혐오한다. 그것이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이슬람이든, 신앙에서 숭배의 단계로 넘어가 버린 모든 종교인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그들 자신은 ‘참 신앙’과 ‘미개한 숭배’의 경계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주변이 늘 성가시게 시끄럽다. 그러나 이런 비이성적 숭배는 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대의학과 과학에 더 만연해 있었다.
예전에 당뇨병에 관하여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초기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한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그에게 도움을 주려고 쓰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친구로부터 먼저 왔다.
‘씨바넘아 니말대로 했다가 나 죽으면 니가 책임질래? 당뇨병 기본도 모르는 쉐이가.. 인터넷이라도 돌아댕기면서 당뇨 공부부터 좀 해라’
졸지에 아무것도 모르는 무당같은 놈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해 하기로 했다. 자기 생명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이 되면 민감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들이 가진 현대의학적 치료법에 대한 맹신은 종교의 숭배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답답했다. 현대의학의 노예가 되어버린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병에 걸리고 낫는 이치는 의외로 간단하다. 자연의 이치에 順하면 건강하고 逆하면 병에 걸리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단순한 절대적 이치는 외면하고 과학의 냄새가 풍기는 현란한 의학용어의 현대의학을 더욱 신뢰하고 그것에 매달린다. 현대의학은 오늘도 눈부시게 발전하고 변화한다. 사람들은 그 발전을 칭송하지만, 발전이라는 것은 기실 그것은 늘 틀려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라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의학의주술에 빠진 사람들은 한쪽 면만을 좇으며 숭배자가 되고 현대의학의 굴레속에서 생명연장만 갈구한다. 미국 교포할머니들의 일과는 굉장히 단순하다. 아침에 눈떠서 집을 나서서 하루종일 시간에 맞춰 병원들을 순례하다보면 하루가 저문다. 모든 치료가 공짜다. 숨을 쉬고 살아는 있되, 사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약의 노예로 생명을 억지 연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의료산업의 배는 불러간다.
숭배는 한의학에도 있었다. 자연의 이름을 빌어 난무하는 온갖 진단법들, 한약들, 치료법들. 다시 입에 올리기조차도 부끄러운 무지몽매한 술법들이 한의학을 껍질을 쓰고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었다. 어제 들었다. 200알에 400만원 한다는 성장 환약. 한 알에 2만원인 셈이다. 종합비타민 한알보다도 효과가 없을 환약 한알이 2만원이라니.
그러나 이들 의학보다도, 종교보다도 더 광범위하게 만연된 숭배가 있었다. 현대의학이나 한의학에 대한 잘못된 신뢰는 그래도 병에 걸린 환자들에 국한 하기 때문에 정도가 덜하다. 종교에 대한 숭배도 그 종교를 벗어나면 공감대가 전혀 없으니 다행이다.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모아 찬양하며 숭배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오류투성이의 영양학에 대한 숭배였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가장 광범위한 숭배는 바로 이 오류투성이의 영양학이었다.
그래서 칼로리에 대한 허구와 우유와 고기에 대한 숭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중 다른 것들은 대개 자기 자신의 문제들이다. 당뇨병에 걸려서 남들보다 고생 하다가 일찍 죽는다든가 하는 개인적인 문제들이다. 그러나 우유와 고기는 문제가 달랐다. 그것은 내 개인의 건강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생존문제와도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일부 육식문화사람들이 먹을 소고기를 만들기 위해 소비되는 비용에 이렇게 미래 지구의 환경파괴라는 엄청난 비용이 추가되고 있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나 동물보호론자가 아니다. 실제로 나도 가물에 콩 나듯 이지만 고기를 먹는다. 예전엔 나도 고기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입에서 땡긴다는 것은 몸에서 그만큼 필요하다는 증거’라는 신조를 굽힌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자연의 이치라는 것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어갔다. 그래서 바뀐 것들을 직접 내 몸에, 내 마음에 실험해 나갔다. 그래서 확신이 서면 그것을 남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연역적으로 도출한 가정을 따라 자연의 이치를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자연의 이치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에 順하면 건강하고 그것에 逆할 때 병이 난다는 절대불변의 진리를 보고 그것을 알리려 노력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먹는 즐거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다. 일찍이 식도락에 눈을 뜬 송충이만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식도락을 인생 즐거움의 상당부분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 즐거움을 모조리 외면하고 살자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친구를 만나서 삼겹살을 구워먹으면서 소주 한잔을 기울이는 것을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입맛이 없어서 입이 껄껄할 때 맛있는 갈비찜으로 입맛을 돋우는 것을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고기소비의 왕국, 고기가 주식처럼 여겨지던 미국에서도 채식문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내가 인용한 모든 수치나 자료들은 이렇게 미국에서 발행된 것들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점점 더 고기 먹기에 혈안이 되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고기를 절대 먹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먹기는 먹되 자연에 미안함을 알고 그들의 소중함을 알고, 그렇게 자연에게 겸손해 하면서, 그리고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돌려줄 지구의 환경을 생각하면서 조금씩 덜 먹자는 것이다. 아직 고기를 그리 많이 먹고 있지 않다면 일부러 더 먹으려 노력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몸 생각한다며, 애 키커야 한다며 일부러 날마다 고기음식을 만들어 먹지 말고, 우리가 어렸을 적 연례행사로 먹었던 그 고기만큼 씩만 먹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연을 알고 겸손해 질 때, 언젠가 우리는 다시 평화가 찾아온 지구상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어 먹으면 자란 건강한 소의 고기를 감사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육식숭배 1 – 인트로
→ 육식숭배 2 – 인간은 초식동물이다
→ 육식숭배 3 – 인간은 잡식동물도 아니다
→ 육식숭배 4 – 고기를 먹어줘야 한다는 이유
→ 육식숭배 5 – 인간은 똥자루
→ 육식숭배 6 – 단백질은 그리 필요하지 않다
→ 육식숭배 7 – 단백질과 인간
→ 육식숭배 8 – 갑빠엔 닭가슴 살?
→ 육식숭배 9 – 우리 몸의 땔감
→ 육식숭배 10 – 단백질은 연료가 아니다
→ 육식숭배 11 – 고기먹어야 힘난다는 분들
→ 육식숭배 12 – 도살, 그 끔찍함
→ 육식숭배 13 – 지옥에서 도살장으로
→ 육식숭배 14 – 인류의 기아
→ 육식숭배 15 – 열대우림의 파괴
→ 육식숭배 16 – 사막화
→ 육식숭배 17 – 기후재앙
→ 육식숭배 18 – 끝맺음
→ ’LA 별곡’ 메인 페이지로 가기
숭배에 대한 경계
내가 세상에서 제일 경계하는 것은 崇拜다. 대상이 뭐가 되었든 무언가를 비이성적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을 가장 경계한다. 숭배라는 것은 이성적 판단이 완전 배제된 맹목적 추종과 복종이다. 미개한 숭배는 자기 자신에게는 물론 사회전체에도 해악을 끼치는 죄악이다. 종교에서의 숭배를 가장 혐오한다. 그것이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이슬람이든, 신앙에서 숭배의 단계로 넘어가 버린 모든 종교인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그들 자신은 ‘참 신앙’과 ‘미개한 숭배’의 경계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주변이 늘 성가시게 시끄럽다. 그러나 이런 비이성적 숭배는 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대의학과 과학에 더 만연해 있었다.
예전에 당뇨병에 관하여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초기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한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그에게 도움을 주려고 쓰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친구로부터 먼저 왔다.
‘씨바넘아 니말대로 했다가 나 죽으면 니가 책임질래? 당뇨병 기본도 모르는 쉐이가.. 인터넷이라도 돌아댕기면서 당뇨 공부부터 좀 해라’
졸지에 아무것도 모르는 무당같은 놈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해 하기로 했다. 자기 생명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이 되면 민감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들이 가진 현대의학적 치료법에 대한 맹신은 종교의 숭배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답답했다. 현대의학의 노예가 되어버린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병에 걸리고 낫는 이치는 의외로 간단하다. 자연의 이치에 順하면 건강하고 逆하면 병에 걸리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단순한 절대적 이치는 외면하고 과학의 냄새가 풍기는 현란한 의학용어의 현대의학을 더욱 신뢰하고 그것에 매달린다. 현대의학은 오늘도 눈부시게 발전하고 변화한다. 사람들은 그 발전을 칭송하지만, 발전이라는 것은 기실 그것은 늘 틀려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라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의학의주술에 빠진 사람들은 한쪽 면만을 좇으며 숭배자가 되고 현대의학의 굴레속에서 생명연장만 갈구한다. 미국 교포할머니들의 일과는 굉장히 단순하다. 아침에 눈떠서 집을 나서서 하루종일 시간에 맞춰 병원들을 순례하다보면 하루가 저문다. 모든 치료가 공짜다. 숨을 쉬고 살아는 있되, 사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약의 노예로 생명을 억지 연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의료산업의 배는 불러간다.
숭배는 한의학에도 있었다. 자연의 이름을 빌어 난무하는 온갖 진단법들, 한약들, 치료법들. 다시 입에 올리기조차도 부끄러운 무지몽매한 술법들이 한의학을 껍질을 쓰고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었다. 어제 들었다. 200알에 400만원 한다는 성장 환약. 한 알에 2만원인 셈이다. 종합비타민 한알보다도 효과가 없을 환약 한알이 2만원이라니.
그러나 이들 의학보다도, 종교보다도 더 광범위하게 만연된 숭배가 있었다. 현대의학이나 한의학에 대한 잘못된 신뢰는 그래도 병에 걸린 환자들에 국한 하기 때문에 정도가 덜하다. 종교에 대한 숭배도 그 종교를 벗어나면 공감대가 전혀 없으니 다행이다.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모아 찬양하며 숭배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오류투성이의 영양학에 대한 숭배였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가장 광범위한 숭배는 바로 이 오류투성이의 영양학이었다.
그래서 칼로리에 대한 허구와 우유와 고기에 대한 숭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중 다른 것들은 대개 자기 자신의 문제들이다. 당뇨병에 걸려서 남들보다 고생 하다가 일찍 죽는다든가 하는 개인적인 문제들이다. 그러나 우유와 고기는 문제가 달랐다. 그것은 내 개인의 건강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생존문제와도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일부 육식문화사람들이 먹을 소고기를 만들기 위해 소비되는 비용에 이렇게 미래 지구의 환경파괴라는 엄청난 비용이 추가되고 있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나 동물보호론자가 아니다. 실제로 나도 가물에 콩 나듯 이지만 고기를 먹는다. 예전엔 나도 고기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입에서 땡긴다는 것은 몸에서 그만큼 필요하다는 증거’라는 신조를 굽힌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자연의 이치라는 것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어갔다. 그래서 바뀐 것들을 직접 내 몸에, 내 마음에 실험해 나갔다. 그래서 확신이 서면 그것을 남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연역적으로 도출한 가정을 따라 자연의 이치를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자연의 이치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에 順하면 건강하고 그것에 逆할 때 병이 난다는 절대불변의 진리를 보고 그것을 알리려 노력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먹는 즐거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다. 일찍이 식도락에 눈을 뜬 송충이만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식도락을 인생 즐거움의 상당부분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 즐거움을 모조리 외면하고 살자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친구를 만나서 삼겹살을 구워먹으면서 소주 한잔을 기울이는 것을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입맛이 없어서 입이 껄껄할 때 맛있는 갈비찜으로 입맛을 돋우는 것을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고기소비의 왕국, 고기가 주식처럼 여겨지던 미국에서도 채식문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내가 인용한 모든 수치나 자료들은 이렇게 미국에서 발행된 것들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점점 더 고기 먹기에 혈안이 되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고기를 절대 먹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먹기는 먹되 자연에 미안함을 알고 그들의 소중함을 알고, 그렇게 자연에게 겸손해 하면서, 그리고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돌려줄 지구의 환경을 생각하면서 조금씩 덜 먹자는 것이다. 아직 고기를 그리 많이 먹고 있지 않다면 일부러 더 먹으려 노력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몸 생각한다며, 애 키커야 한다며 일부러 날마다 고기음식을 만들어 먹지 말고, 우리가 어렸을 적 연례행사로 먹었던 그 고기만큼 씩만 먹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연을 알고 겸손해 질 때, 언젠가 우리는 다시 평화가 찾아온 지구상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어 먹으면 자란 건강한 소의 고기를 감사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육식숭배 1 – 인트로
→ 육식숭배 2 – 인간은 초식동물이다
→ 육식숭배 3 – 인간은 잡식동물도 아니다
→ 육식숭배 4 – 고기를 먹어줘야 한다는 이유
→ 육식숭배 5 – 인간은 똥자루
→ 육식숭배 6 – 단백질은 그리 필요하지 않다
→ 육식숭배 7 – 단백질과 인간
→ 육식숭배 8 – 갑빠엔 닭가슴 살?
→ 육식숭배 9 – 우리 몸의 땔감
→ 육식숭배 10 – 단백질은 연료가 아니다
→ 육식숭배 11 – 고기먹어야 힘난다는 분들
→ 육식숭배 12 – 도살, 그 끔찍함
→ 육식숭배 13 – 지옥에서 도살장으로
→ 육식숭배 14 – 인류의 기아
→ 육식숭배 15 – 열대우림의 파괴
→ 육식숭배 16 – 사막화
→ 육식숭배 17 – 기후재앙
→ 육식숭배 18 – 끝맺음
→ ’LA 별곡’ 메인 페이지로 가기
'자연의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장탕? 2 - 효과가 있을리가 없는 성장탕 (0) | 2006.02.27 |
---|---|
성장탕? 1 - 크거나 말거나 돈만 벌면 되는 한의사 (0) | 2006.02.26 |
육식숭배 17 - 가축으로 인한 기후 재앙 (0) | 2006.02.25 |
육식숭배 16 - 가축으로 인한 지구의 사막화 (0) | 2006.02.24 |
육식숭배 15 - 가축, 열대우림의 파괴 (2) | 2006.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