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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깨달음 1 - 쉽게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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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읊은 것을 悟道頌이라고 한다)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설리도화편편비(雪裡桃花片片飛)

사나이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몇사람이나 오래도록 나그네로 지냈는가
한소리로 온 우주를 갈파하니
눈속에 복숭아꽃 하늘하늘 날리는구나

그럴듯 하다. 근데 솔직히 말해보자. 이게 뭐 어쩌자는 거냐? 도대체 이걸 읊은 자가 뭘 어떻게 悟道했다는 것인지는 오직 본인만 안다. 이런걸 만해같은 선사가 읊으면 오도송이 되고, 내가 읊으면 '오도'방정 童詩가 된다.

상기병이라는 것을 얘기하다보니 상기병으로 고생하면서까지 사람들이 얻으려고 하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래서 그게 궁금해졌다. 그 힘든 수도, 수련, 수행을 왜 하는가? 공중부양을 해서 사람들을 놀래키고 싶어서? 유체이탈을 해서 님의 방에 몰래 가보고 싶어서?

도를 얻기 위함인가? 깨닫기 위함인가? 해탈하기 위함인가? 반정도는 의미심장한 뜻이 있고, 반 정도는 그저 말장난이다. 종교인이 말하면 종교냄새가 나지만 비종교인이 말하면 그냥 일상용어일 뿐이다. 공통적인 것은 다 ‘저 편하자고 하는 짓’이다. 내가 도를 닦는다고 기술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고 태풍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 혼자 맘 편안하게 몸 건강하게 잘 살려는 개인의 욕심에서 우러난 것일 뿐이다. 따라서 그걸 대중에게 알리거나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 한, 도닦는 행위는 그저 이기주의의 극치이다.

만약 이세상 모든사람이 산에 쳐박혀 이렇게 도를 구하는 길에만 정진한다고 치자. 농사는 누가 짓고, 컴퓨터는 누가 만들고,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은 누가 만드나.. 도 닦는 사람들.. 세상살이 괴로운 놈이 저 편하자고 도 닦는거라고 말하면 좀 심한가.

道라는 말은 워낙이 잡다한 것들이 침투해 들어가 있으니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냥 우리가 흔히 일상으로 쓰는 용어라고 결론짓겠다. ‘온 세상에 도사가 난무하는 시절에 누가 진짜 도사인줄 구분해낼 재간이 없으니 그저 싸잡아 전부 도둑놈 쳐버리면 마음이 편해지니.. 바로 그때 내가 도사가 된다.’ ‘그 사람 일생을 파더니 방면에 도사가 됐어’.. 이렇게 일상용어 되겠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보고자 하는 말은.. 불교 혹은 도교냄새가 나는 말 ‘깨달음'. 물론 이것도 일상생활에서 너무나도 많이 쓰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바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영어로 Enlightenment라고 번역되는 소위 ‘깨달음’ 이란 그것과는 약간 의미를 달리하는 것 같다. “더 밝아지게 한다?” 그래서 먼저 이 깨달음이라는 것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관한 설명에서 그 뜻을 찾아보기로 했다.

苦聖諦, 集聖諦, 滅聖諦, 道聖諦.. 이렇게 네가지 과정이 깨달음이라는데.. 이게 도대체 뭔 말인가? 해석된 것을 아무리 읽어봐도 그 해석이라는 것이 더 어렵다. 그저 내 맘대로 정리해서 정의를 내린다.

1.苦聖諦
살아간다는 것은 자체가 苦이다. 生老病死의 4苦와 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 怨憎會苦(미워하는 놈과 만나는 고), 求不得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 五取蘊苦 (五蘊의 집착에서 생기는 고)를 더해 모두 8苦이다. 이렇게 苦라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이 고성제이다.

2.集聖諦
苦를 일으키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욕망이다. 인생의 모든 불행, 괴로움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욕망은 苦의 뿌리이다. 이 욕망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집성제이다.

3.滅聖諦
滅이란 열반(涅槃 nirvana)이다. 열반은 消滅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고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고의 실체를 알고 고의 원인을 알고, 그것들을 완전히 없앤 상태, 고에서의 완전한 해방을 이루는 것이 멸성제이다.

4.道聖諦
道란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을 떠난 중간의 길이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 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의 길"을 말한다. 이처럼 열반을 얻기 위해 중도를 실천하는 것이 도성제이다.


이걸 한마디로 다시 정리한다면.. 苦에서 어떻게 벗어나는가가 깨달음의 과정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실체와 그 원인을 알고, 그것들을 완전히 버려나가며 정진하는 그 자체인 것이다.

부처님이 너무나도 쉽게 설명하신 것을, 제자라는 놈들이 괜시리 어렵게 엮어놓았고, 후세에 학자라는 넘들이 그걸 배배꼬고 또 꼬아서 해석이랍시고 갖다 붙여놓았건만 점점 더 난해해 진다. 그래서 내가 다시 그걸 쉽게 내 멋대로 풀었는데도 역시 마찬가지다. 더 쉽게 요샛말로 더 풀어야 겠다. 암만 생각해도 속세에서 도를 닦고 도를 구하는 것이 진정 구도의 길인 듯한데 말이다.


→ 깨달음 1 – 쉽게 생각해 보자
→ 깨달음 2 – Enlight? Realize?
→ 깨달음 3 – 중간단계의 부작용
→ 깨달음 4 – 불가사의한 과정
→ 깨달음 5 – 추상화는 사기다
→ 깨달음 6 – 깨달음도 혹시 사기?
→ 깨달음 7 – 이단아, 성철스님
→ 깨달음 8 – 절에 갈 필요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