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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깨달음 8 - 절에 갈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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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平欺誑男女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彌天罪業過須彌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活陷阿鼻恨萬端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一輪吐紅掛碧山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일생동안 사람들을 속였단다.. 즉 거짓말을 했단다. 그래서 그 죄가 넘쳐난단다..

먼저 난리가 난 건 기독교인들이었다.
그것 봐라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임을 모르고 산 것을 후회하는 글이라는 둥.. 성철 스님이 말년에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내심 말 못하는 갈등으로 괴로워하며 방황하다가 결국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둥..

그러자 불교계에서 이것을 해명하기를
열반송의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라는 말은 "사람들이 자기 속에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그것을 개발하려 노력하지 않고 나만 쳐다보니, 결국 내가 그들을 속인 꼴"이란 얘기다. 그러니 "나를 쳐다보지 말고, 자기 자신을 바로 봐라. 마음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라"는 가르침이다.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라는 말은 "모든 중생들을 깨우치지 못하고 떠나니 섭섭하기 짝이 없다"고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성철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늘 그런 얘기들을 많이 했다고 한다. ‘중에게 속지마라’.
친견하려면 삼천배를 하게 한 것도 교만해서가 아니라 중에게 속지 말라는 것을 손수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중은 중일 뿐, 부처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본의 아니게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우러르며 산부처니 어쩌니 하는 것에 늘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열반송에서 그 당혹감과 괴로움을 토로하신 걸 보면. (물론 이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수가 있다)


성철스님은 한국 선종의 신화다. 그분의 한말씀 한말씀이 후학들의 경전이 될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분이다. 그분의 수행시절의 일화들은 수행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이기적인 것(!)이라는 걸 알게 해주었고, 던지던 법어들은 그분이 분명히 ‘인간’이었음을 다시 보게 해주었고, 마지막 ‘최후말씀’에선 깨달음이 수행에만 있지 않으며 그걸 바로잡지 못한 자기가 잘못했던 것을 솔직히 고백하셨다. 열반송에서 말씀하신 그 내용의 본뜻이 뭔지는 돌아가신 그분만이 알겠지만 나는 내 멋대로 이렇게 받아 들인다.

‘내가 그린 추상화는 약간 사기였다’


출가는 이기주의의 극치다.
속세에 빚이 없는 상태에서 머리깎고 출가하는 것이야 누가 뭐래는 사람이 없지만..
까 놓은 새끼도 있고 봉양해야 할 노모도 계시는 넘이 어느날 돌연히 출가를 했다. 만약 이넘이 지가 까놓은 새끼의 안위도 몰라라한채, 낳아주신 어머니도 길러주신 아버지도 몰라라 한채 산사에 쳐박혀 수행하다가 득도를 해서 절대 평안의 경지를 얻었다면..

그렇게 속세에 남긴 어머니나 새끼의 가슴이 저며지든 타락하든.. 저만 득도를 하여 저 마음만 절대평안을 얻었다면, 이 넘 극락에 갈까? 천국에 갈까? 이거 누구를 위한 득도인가?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이거.. ‘저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의 극치아닌가? 산사에 틀어박혀 속세와 절연하고 얻는 그 깨달음은 우리 같은 ‘상식적인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깨달음이나 득도와는 전혀 다른 ‘자기네들 만의 득도’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그 추상화와 한가지 아니던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던 패배자가 경쟁사회에 환멸을 느껴 출가하여, 속세와 완전 절연된 산사에서 수련하다 얻는 그 편안함, ‘자기네들만의 깨달음’이라면 그것은 이기주의의 극치, 패배주의의 화신이다.

자고로 진정한 깨달음이란 외부와 단절된 선방에서가 아닌, 괴상한 군상들 우글거리는 속세에서 사람들과 극렬하게 부딪히면서 얻는 것이며, 그것만이 인류에게 진정한 가치를 돌려줄 수 있는 참 깨달음의 모습이다. 선사도 말씀하셨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였다고.

산사에서 얻은 깨달음은 온실속 화초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사람들이 속세에서 살아가며 분노를 조절하게 되고 남을 배려하게 되고 가족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면서 깨닫는 평안함을 이름이다.

왜 득도를 하려면 속세와 완전하게 절연을 해야만 할까? 왜 머리를 깎아야 하고 회색빛 중 옷을 입어야 하고 계룡산 깊은 산골에 쳐박혀야 할까? 유난스럽게 속세와 모든 인연과 완벽하게 절연을 해야 하기 때문이겠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수련에 방해받지 않기 위함이라면 그 수련과 수련후에 얻는다는 깨달음은 도대체 어떤 가치가 있는가? 심하게 말한다면.. 산사에서의 ‘득도’가 어스름한 도시 뒷골목에서 얻은 으스스한 ‘개싸움의 경지’보다 더 숭배되어야 할 이유는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도 닦는 분들, 주변사람 속이면서 죄 짓지 말고 깨달음과 득도의 환상에서 깨어나자.

(혹시 종교문제로 비쳐질까봐 미리 말하는데, 나는 성철스님을 굉장히 존경한다. 그분의 말씀을 내 멋대로 끌어다 내 멋대로 해석을 한게 좀 잘못이다)


→ 깨달음 1 – 쉽게 생각해 보자
→ 깨달음 2 – Enlight? Realize?
→ 깨달음 3 – 중간단계의 부작용
→ 깨달음 4 – 불가사의한 과정
→ 깨달음 5 – 추상화는 사기다
→ 깨달음 6 – 깨달음도 혹시 사기?
→ 깨달음 7 – 이단아, 성철스님
→ 깨달음 8 – 절에 갈 필요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