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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깨달음 3 - 중간단계의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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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과정중에 판깔고 교주가 되는 사람들이 많다. 은총을 받았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다. 자기 멋대로)


수행도중 수행자를 괴롭히는 골치 덩어리 정신병이 셋 있는데(일반적으로 그렇단 얘기다. 어디 괴롭히는 게 이 세가지 뿐이랴) 바로 산란심(散亂心), 수마(睡魔)와 무기(無記) 이 세가지라고 한다.

처음엔 오만가지 잡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온통 머리속에 번뇌의 헛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산란심), 거기서 벗어났다 싶으면 이번엔 잠병에 깊이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수마), 나중엔 별 생각이 없이 그냥 그렇게 흐리멍텅한 생각에 머물거나, 드디어 깨달았다는 착각 (무기)에 빠진다고 한다.

좀 그럴싸하게 설명을 하는걸 보면 散亂心은 有이고, 睡魔는 無이고, 有도 無도 아닌 아리깔딸한 경우가 無記라고 한다네. 이넘 저넘 이년 저년 수련 한다고, 참선한다고 앉아는 있지만 이 세가지, 특히 산란심도 벗어버리지 못하고 시간을 허송하다 죽는 년넘이 99% 이상 대다수라고 본다.


1. 산란심(散亂心)
초심자가 수련에서 겪는 가장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망상으로 인한 散亂心이다. 불교에서 괴상한 말장난처럼 보이는 화두를 잡는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산란심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화두를 들고 있음으로 해서 화두에 전념하기 때문에 부산하게 일어나는 망상을 잠재울 수 있다고 한다.

근데 직접 흉내를 내 보면 이 산란심이라는 거 그리 녹녹치 않다. 정말이지 징그러울 정도로 생각에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몇십년 동안 한번도 떠 올리지 않았던 어린시절 동네 구멍가게의 모습도 보이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느닷없이 강당에서 노래도 부르고 있다. 눈을 뜨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집중을 방해하고 눈을 감으면 온갖 망상이 괴롭힌다.

번뇌는 시시비비의 분별심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평소에 시시비비 분별을 잘 하던 사람이 수련을 하려면 이러한 시비심을 줄이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이게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산란심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처럼 자칭 ‘정의의 사도’, 타칭 ‘싸움쟁이’ 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늪을 헤어나오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그 흔하디 흔하다는 상기병도 한번 경험해 보지 못하지 않았던가.


2. 수마(睡魔)
산란심에서 겨우 벗어나 속세의 필름들이 드디어 끊어지니 마음이 평안해지고 머리속이 깨끗이 비워졌다 싶었는데 다음엔 바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혼침에 계속 빠지는 수마에 떨어진다고 한다. 정신이 탁하게 가라앉아 졸립거나 명료하지 못한 상태, 살아는 있지는 송장처럼 죽어 있는 듯 살아 있는 듯 하는 이 혼침이 계속되고 급기야는 시도 없이 습격하는 잠을 이기지 못하는 수마에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장(魔障)이란 말이 붙어 있을 만큼 무섭다고 한다. 고삼 수험생들의 수마도 이와 비슷할 것, 책상 앞에만 앉으면 무섭게 쏟아지는 그 졸리움, 잠깐 눈붙이고 일어나야지 하고 엎드리면 바로 아침이 되어버리는 그 무시무시한 잠병. 잠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는 사람은 도를 절반 가량 이룬 것이라고 했다. 선사들 중에 잠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극히 짧은 시간에 수면을 취해도 능히 휴식을 취한 경우이다. 마음이 깨끗해지면 가능하다고 하는데 마음이 항상 더러운 나는 경험해 본적이 없어서 진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3. 무기(無記)
이게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한다. 記는 판단, 판정의 의미라고 하니 無記는 善이라고도 惡이라고도 단정하지 못하는 善도 惡도 아닌 성품을 의미한다고 하는데..이 원뜻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아마 ‘생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아침에 잠이 덜 깨어 멍한 상태, 술에 취해 몽롱한 상태, 꿈도 없는 깊은 잠이 들었을 때, 기절 했을 때 등이 모두 무기의 한 형태인 것이다.

일반인들도 이와 비슷한 경험들을 평생 많이 한다. 사는 건지 죽어 있는 건지, 노력하는 건지 포기한 건지, 사랑하는 건지 질투하는 건지, 삶의 목표가 있는 건지 죽지 못해 그냥 사는 건지.. 어렵게 생각 할 거 없이 이런 것들이 일상에서의 무기가 아닌가 싶다.

수련도중 나타난다는 무기도 이것과 동전의 또 다른 면과 같이 마찬가지일 터. ‘의문이 없는 죽은 참선’을 하다 비몽사몽간에 이 無記空에 떨어진다고 하는데 굳이 심하게 비유한다면 심각한 과대망상 정신병에 걸려 온세상이 우습게 보이는 경우나, 혼수 상태에 깊이 빠진 식물인간의 경우와 비슷한 것 같다.

이러한 무기는 몽롱한 자기 최면상태이다. 편안한 경계가 더할 수 없이 고요하다. 이걸 깨달은 것으로 착각해서 내 깨달음을 인증해 달라고 졸라대는 통에 스승들이 괴롭다는데.

迷妄을 없애고 깨달음을 얻겠다고 수행의 길로 접어들었다. 수행을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덧 괴롭히던 상기병과 산란심도 없어지고 죽을 것 같았던 수마에서도 벗어나니 어느 날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밝아짐과 편안함을 주는 무엇을 만난다. 그래서 이러한 境界, 즉 밝은 듯 하면서 편안한 경계를 禪定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佛性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얻은 것, 得道를 한 것으로 자기 혼자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무기는 흐르는 물이 웅덩이에 잠겨서 썩는 일이라고 한다. 무기에 빠지면 智慧의 끈이 끊어지므로 그릇된 집착만 생기게 되고, 무기를 득도로 착각하여 고집하면 사이비교주가 되는 첩경이 된다.


그러나.. 내 개인적 생각엔 좌우간 어찌되었건 이렇게 편안한 경계에 들어서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전문가들은 굳이 아니라고 하네. 잡념 하나 없이 번뇌가 사라지고 고통이 없는 절대적 편안한 경계에 들어섰으면 그것으로 성공 아닌가? 의문과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마도 자기네들끼리만 인정하고 싶은 어떠한 또 다른 경계가 있는지..그건 모르겠다.

이 무기를 극복하는 길은 오로지 스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내가 이른 경계가 삿된 것임을 깨쳐야 그곳에서 빠져 나오는데 그것을 깨우쳐 줄 만한 절대적 권위의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이 무기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냄새가 좀 난다. 스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아무튼 그렇다고 치고.. 이 무기를 극복을 하면 드디어 깨달음의 세계가 멀리 보이기 시작한대나..
어떻게 보이나.


→ 깨달음 1 – 쉽게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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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 5 – 추상화는 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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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 8 – 절에 갈 필요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