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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예수님의 얼굴, 성숙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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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두번째 그림이 '과학적으로 복원'된 예수님의 얼굴이고, 세번째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잘생긴 백인 남자 예수님의 얼굴이다. 만약 첫번째 두번째 예수님 그림을 보고 기분이 나쁘거나, 내게 한마디 하고싶어 속이 부글거린다면.. 자신의 신앙에 의문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올바른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라나는' 믿음이다. 자라나야 한다. 자라나지 않는 신앙은 위험하다. 마치 어렸을적 ‘우리 아빠가 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말을 어른이 돼서도 곧이 곧대로(문자적으로) 믿는 어린아이와도 같다. 그 유아적인 어른은 가는곳마다 '우리아빠만 최고'를 외치며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성가시게 만든다.

이미 다른사람들은 '우리아빠만 최고'를 떠나 '남의 아빠도 최고'일 수도 있다는 성숙한 사회적 판단을 하고 있는데, 유독 이 사람만 '자기아빠만 세상에서 최고'라고 우기고 다니니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다. 그 유아적 어른은 더더욱 무리를 지어 다니며 땅끝까지 좇아가 다른사람들을 설득하려 한다. 그러다 어느 땅에서 '자기아빠만이 최고'라고 굳게 믿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 기독교에만 특유하게 나타나는 이러한 배타성, 근본주의적 성향은 대체로 특정 시기와 상황에만 유효했을 신앙관(한국 교회는 주로 미국 남부 빈민촌 근본주의적인 장로교회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는 유아적 믿음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의 기독교가 유아적인 신앙관에 빠져 영적인 발전을 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 읽기 태도는 '그 자체로 모순적'인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을 맹신하게 만든다. 성경이 그런 수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결코 성경의 존엄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숙한 어른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으려 하는 그 순간 그는 이미 '우리아빠 최고'의 유아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노아의 이야기를 ‘믿는 것’은 그것이 역사적 과학적으로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다(물론 일부 기독교인 중에는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증명하려고 까지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뜻을 헤아려 보고 얻는 것이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우주를 지배하는 실존적 유일한 분'이라는 생각에서, 아주 먼 그 옛날 '유대민족들의 부족신' 혹은 '우주를 지배하는 상징적인 힘' 으로 개방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때 신앙은 성숙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됨이 '위대한 성인' 에 대한 '따름'이지, (직업적 종교인에 의해 필요에 의해 신격화 된) 또다른 '신'에 대한 맹종이 아니라는 것에 수긍을 할때 신앙은 성숙한다.

우리가 머리속에 그리고 있는 예수님의 형상이 잘 생긴 스칸디나비아 미남이 아니라, 코가 뭉뚝하고 피부색은 검고 머리카락이 약간 곱슬곱슬한 팔레스타인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수긍할때 신앙은 성숙한다.

성경의 말씀에는 일점일획의 틀림도 없다고 고집을 부리기 보다, 성경이 오랜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첨삭되고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번역되면서 많은 모순과 오류가 있음을 인정할때 신앙은 성숙한다. 구약의 시대엔 직접 인간을 통치하시며 '사사건건' 잘잘못을 가려주시다가 예수님 이후 한번도 직접 나타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한번쯤 실제적인 의문을 가져볼 때 신앙은 성숙한다. 성경이 진리이기 위해서 반드시 '문자적으로 진리'일 필요는 없다. 즉, 문자적으로 진리이지는 않더라도 얼마든지 진리일 수 있다. 성숙한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한다.

“절대자 하나님과 하나되는 체험을 통해 삶을 완성시키는 것, 그것을 신앙의 궁극목표” 로 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것(汎, pan)이 하나님(神, theos) 안에(en) 있다(在)’는 생각, 이른바 범재신론이 성립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계신다'는 생각이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하나됨을 체험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분이다.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예수를 신격화하여 받드는 ‘예수에 대한 믿음’ 보다 예수가 보여주었던 인간 완성으로서의 ‘예수의 믿음을 믿는 믿음’ 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 가 아니라 '예수의 믿음을 믿는다'는 것, 진정으로 예수와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예전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부활하는 엄청난 변화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다. 함께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를 변화시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아적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하느님의 왕국건설보다는 지구의 평화를 생각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여야 하고, 더 나아가 이제는 우리교회 안에 과연 구원이 있는지 냉철하게 돌이켜 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