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31. 16:27

노스탤지어 금단증

"Nostalgia"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적 고통을 뜻하는 의학용어였다고 합니다. 물론 요즈음엔 이 단어가 '고통'보다는 '그리움' 정도의 서정적 뉘앙스가 되었습니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상황에선 '고통스런 그리움'은 잠시이고 금세 '애틋한 그리움'으로 바뀌며, 그 그리움이 고통스런 현실을 이겨내게 해주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군대시절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됩니다. 잠시동안을 제외하곤 '그리움'이란 것이 늘 기쁨의 에너지로 작용했었습니다. 세월에 시달리면서도, 얼차려를 받는 동안에도 그리운 것들을 떠올리면 고통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잊었습니다. 그 짧은 걸 노스탤지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군대에서의 이 '유사' 노스탤지어는 제대와 동시에 씻은듯이 사라졌었습니다.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그리움이 모두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노스탤지어는 18년 이민생활에서였습니다. 유사 노스탤지어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효과차원에서 비교한다면.. 군대에서의 그것은 '비타민'이었고, 이민생활에서의 그것은 '마약'이었습니다. 18년 이민생활을 버티게 해준 건 바로 마약효과를 내던 노스탤지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놀랍도록 낯섭니다. 어떻게든 살아내 보려고 발버둥치던 18년전의 이역만리처럼 생경하고, 암울하다 여겼던 35년전의 대한민국보다 더 어두워져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마치 전쟁터에 떨어진 느낌입니다. 전쟁터를 피해 기껏 돌아온 고향이 또 다른 전쟁터로 느껴지는 겁니다.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오래된 노스탤지어는 애틋한 '그리움' 이 아니었습니다.  마약에 쩔어 오랜기간 덧씌워진 '환상'이었습니다. 마약이 끊기자 환상이 깨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오랜 기간 환상으로 품어왔던 첫사랑을 실제로 만나곤 묘하게 마음을 상하듯 말입니다.

고향에 돌아와 오히려 많은 것들을 잃었다고 허전해했었습니다만 사실 그 많은 것들은 '이미 존재하지조차 않던' 환상이었습니다. 환상을 제가 현실로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오래된 노스탤지어의 장난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 보면 가석방된 장기복역수들이 자유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어떻게든 교도소로 되돌아올 궁리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았는데 이게 웬 일입니까. 오랜 이민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역이민자들의 1년이 아마 그런 경우일 것입니다. 

'현실' 쓰나미에 붕괴된 '노스탤지어 없음'이 일상생활에 나른함을 줍니다. 마약중독자가 겪는 금단증인 듯 합니다. 그러는 사이 세번째 노스탤지어가 가슴에 고이고 있습니다


전쟁터가 고향이 되고, 고향이 전쟁터가 되고.. 참 별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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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영호 2016.04.02 13:14 address edit & del reply

    대한민국은 내 나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가급적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북유럽 선진 복지국가와 비교하면 정말 많이 뒤떨어지는게 국민성인거 같습니다.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천대받고 살기 힘든곳입니다.
    경쟁이 너무나 치열하고 시민의식이 아직 바닦이라 고칠점이 한두군데가 아니죠.
    아직 멀었다고 봅니다.

  2. ^^ 2016.04.02 14:41 address edit & del reply

    드라마 시그널에서 과거의 조진웅이 '20년뒤에는 당연히 달라지지 않았겠느냐'고 묻죠. 그때쯤이면 한국에도 정의란 것이 있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이제훈은 대답을 못합니다. 20년후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돈은 많아졌는지 모르겠지만 이땅에 정의는 더더욱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쟁터라고 느끼시는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ㅠㅠ

  3. BlogIcon 이철호 2016.04.03 19:36 address edit & del reply

    고통스러운 상황임에도 피천득의 수필로 전달해 주시네요...

  4. 역이민3년차 2016.04.04 10:02 address edit & del reply

    그 마음 통렬히 공감합니다. 고국의 모든게 싫을때가 있습니다. 공기도 싫고, 에티켓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들도 싫고, 심지어 야구장의 시끄러운 응원문화도 싫고. 자랑스럽게 여기던 고국에 돌아와보니 실상 후진국이었다는 자괴감에 저도 한동안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시간이 약입니다. 잘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5. 독농가 2016.04.04 11:39 address edit & del reply

    도시민으로 살던 사람에게 대한민국 시골도 비슷한거같습니다.
    제가 어릴때 고향산천을 생각하며 시골을 생각했나봅니다.
    그야말로 산천은 의구하는지 의심스럽고, 사람도 간데 없는것같습니다.
    차라리...과거와 현재의 격차도 못느낄 ..외국시골로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6. 싣니 보이 2016.04.04 13:38 address edit & del reply

    참 별일이네요...

    주인장님의 말씀을 들을때마다 제 가슴이 철렁하네요. 개개인이 느끼는건 다르겠지만 큰 테두리내에선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저도 타지생활 20년이고 늦어도 10년내에는 귀국할 생각인데요.
    참 어렵네요.

    그사이 고국에 자주갔었으면 그 괴리감이 줄어들까요???

    어짜피 가게되면 겪게 되겠지만..ㅠㅠ

  7. 샌디에간 2016.04.05 07:47 address edit & del reply

    지난주에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후진국, 전쟁터. 실종된 정의...
    슬프게도 제가 느낀 생각과 정확히 같습니다.
    내 조국은 아직도 후진국이고, 민도가 낮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데
    자기 입으로 걸핏하면 "세계에서..최초.. 몇번째.." 이러고 살더군요.
    먹을건 많은데 무질서하고 예의없고 시끄럽고...
    미친듯이 해외여행 다니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늙어서도 완전히 돌아가 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을 처음 했습니다.

  8. 역역이민자 2016.04.05 08:41 address edit & del reply

    한국은 전쟁터맞습니다. 죽여야 살아남는 약육강식 각자도생하는 불구덩이입니다. 이게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국가의 모든 시스템이 엉망입니다. 깡패가 운영하는 조폭기업같습니다. 두목 사진을 존영이라부르고 두목이 오줌누러 간걸 세면실 갔다고 얘기합니다. 이래도 국민들은 여전히 1번을 찍습니다. 그래서 더 절망적입니다.

  9. 불청객 2016.04.05 10:47 address edit & del reply

    비아냥 그릴려고 하는 건 절대 아님니다. 요팡님 글중에 재미나고 공감가는 글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하나 묻고 싶은 건....야! 이건 대한민국이 진짜 괜찮네 하는 것은 없는 건지 한번 돌아보심도 유익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꺼꾸로 저는 미국에서 2-3년만 살아봤으면 하는데 형편이 안돼서 실행을 못하는 중임다.^^

  10. 길손 2016.04.06 08:03 address edit & del reply

    한국에 살고있는 사람으로서 참 우울해지는 내용이군요. 기분나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윗분 권유대로 대한민국이 진짜 괜찮은게 뭐가 있을까 곰곰 생각해봤는데 딱히 떠오르는게 없음에 더 깊히 우울해집니다.ㅠㅠ

  11. 청년투표 2016.04.06 08:36 address edit & del reply

    보수의 시각에선 이렇게 국민들이 비관적으로 조국을 바라보는 것이 다 역사교육이 잘못되어서, 좌파들이 선동해서 그렇다고 하지요. 국민들의 자긍심이 땅에 떨어지고, 조국을 헬조선 지옥불반도라고 자괴하는 게 다 보수정권 8년의 업적이란 걸 그들만 모릅니다. 무슨 짓을 해도 심지어 나라를 팔아먹어도 새누리당을 찍겠다는 사람들이 조국에 있는 한 조국에 대한 자긍심은 요원합니다.

    • 무인도 2019.04.15 14:54 address edit & del

      본인도 해외생활 몇년 해봤습니다.
      댁은 영원히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사는게 편할것 같네요

  12. 이방인 2016.04.06 15:25 address edit & del reply

    요즘 언어로 쓰담쓰담;;

  13. 싣니 보이 2016.04.07 09:44 address edit & del reply

    불청객님의 질문에 제가 답을 드린다면요...

    대한민국의 장점도 많습니다. 다만 거의 주관적이죠. 음식이 싸고 맛있고 여러종류고, 말통하고, 배달문화좋고, 친구들과 친척들도 많고, 물가싸구요...

    상대적인 면이 있기에 무조건 좋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배달문화란 그만큼 임금이 낮기때문인거고 친구와 친척들이 많은건 장단점이 있더군요. ^^
    물가가 싸다는건 그만큼 벌기도 힘들다는것도 되니깐요.

    다만 크든 작든 개개인의 갑질문화는 꼭 고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14. 싣니 보이 2016.04.07 10:07 address edit & del reply

    근데 아직 전 아직 "노스텔지아"란 마약에 쩔어 보는 시각이니 막상 그속에 들어가 계신 요팡형님의 시각과는 다를수도 있습니다.

    • ^^ 2016.04.07 16:39 address edit & del

      해외에서 머물던 기간이 길면 길수록 한국 적응이 힘들것이구요, 또 나이가 젊으면 젊을수록 한국 적응이 힘들것 같습니다. 그러니 정말 최고난도 딜레마 아닐까요^^

  15. 불청객 2016.04.07 22:18 address edit & del reply

    ㅎㅎ 제가 염려하는 것은 다소 너무 극단적 표현인지는 몰라도 미국(우아, 선) 한국(저질, 악)요런 정도의 분위기로 정리되면 요팡님의 역이민은 결과가 이미 나와버리니 안타까울 수 있고, 한번 더 나아가보면 저를 포함한 이땅 토박이들은 앞으로 전망이 없는 거죠.. ㅎㅎ 저는 미국을 잠시 여행해 봐서 잘 알지 못하지만... 쉽게만 보더라도 갑자기 총맞을 위험이 거의 확실히 없다는 것 이런 것외 좀 다시 생각해 보시고 있으면 알려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