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도로를 꽉 메운 ‘민족의 대이동’을 봅니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입니다만 약간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냥 ‘가족이 모이는 행사’라면 협의해서 장소나 날짜를 조정할 수 있을텐데, 왜 기를 쓰고 '같은 날'에 '같은 장소'에 가는 걸까요? 아마 상당부분 ‘제사’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1970년대에 ‘마주앙’이라는 포도주가 나왔을 무렵이었습니다. 설날 제사를 시작하려던 시간, 장손인 큰댁형이 마주앙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리곤 어른들께 여쭈었습니다. ‘요즈음 제일 좋은 포도주인데요, 오늘 이걸 올리면 어떻겠습니까?’ 순간 어른들이 잠시 당혹해 하셨지만 제 아버지가 재빨리 거드셨습니다. ‘괜찮은 아이디어 같은데.. 할아버지들도 좋은 포도주 드셔보시고..’ 그러자 제일 큰 어른이셨던 둘째 큰 아버지도 웃으시며 ‘그러자’ 하셨었습니다. 장손의 이 당돌한 제안을 받아들이신 건 우리집 어른들이 깨인 분들이시기도 했지만, 큰댁형(현재 82세)이 미국유학을 다녀와 정부기관 높은직에 있던 신세대 브레인이라는 점도 꽤 작용했었을 겁니다. 아무튼 큰댁형의 파격제안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양복입고 제사 모시면 어떨까요? 왜 할아버지들만 제사를 모시죠? 할머니들 서운하시게.. 왜 아들 손자들만 절을 하죠? 딸과 손녀들도 자손인데’.. 사십여년전의 일이지만 지금봐도 파격적인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어렸던 저는 이런 걸 다 떠나, 제사 자체가 그저 귀찮고 번거로웠을 뿐입니다.
조상들이 대대로 이어온 우리의 미풍양속을 지켜 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버려야 할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매장, 제사, 부조를 떠올립니다. 가뜩이나 좁은 땅에 경관을 해치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死者들의 봉분무덤, 가족갈등 부부갈등 교통대란을 일으키는 제사, 경제적 정신적 부담을 서로 ‘집요하게 주고 받는' 부조.
저는 이 세가지중 두가지, 매장과 제사를 이미 거두었습니다. 그것들이 조상을 위하는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을 위한 기복행위’에 불과함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큰일날 소리라구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요. 매장과 제사를 조상님을 위해서 합니까? 아닙니다. 조상님 잘 모셔야 내가 복을 받을거라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화장을 했다가는, 제사를 빼먹었다가는 당장 조상님의 노여움으로 무슨 일 당할까싶어 하는 겁니다. 다행히 제 아버지도 매장과 제사에 대해 상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셨으며 그 뜻을 유언에 남기셨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과감히 두가지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미풍양속은 시대와 사회환경의 산물입니다. 당연히 변하기 마련입니다.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고집은 '지체'를 초래하고 '불편과 갈등'을 초래합니다. 秋夕은 '가을저녁'입니다. 날씨 선선하고 맑은 가을날 하루 그리운 가족들과 오랫만에 만나 웃음꽃 피우라는 날입니다. 고향길 가느라, 제사지내느라, 보기싫은 가족과 어쩔 수 없이 만나 오만가지 갈등을 일으키라는 날이 아닙니다.
제사라는 '형식'을 과감히 버려보십시요. 조상이 노하실까 걱정되십니까? 걱정마세요. 제사 안모셔드린다고, 제삿밥 안차려드린다고 노여워서 후손들에게 해코지하실 그런 속좁고 못된 조상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음'만으로 충분히 기뻐하실 겁니다. 제사라는 형식을 버리면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 질겁니다. 그러고는 싶은데 부모님 눈치보이고 조상님 노하실까 당신대에서 끝내기 주저되신다면, 자식들에게 분명히 이르십시요.
제사는 우리대가 마지막이다. 너희들은 제사 지내지 말고 그저 편하게 모여 재미나게 식사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