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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팡생각

끝 시작

걷기 여행중이던 친구와 순천역에서 합류했습니다. 얼마 전엔 제가 통영에서 누군가를 마중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누군가가 순천역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차 초행길인 주제에 마중하고 마중받는 상황에 잔재미가 있습니다.

 

깜깜한 새벽첫차를 탄 덕에 순천역에 도착하니 아침입니다. 60리터 배낭을 짊어진 그를 보며 잠시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27년간 매일 왕래하던 곳을 어느 날부터 나가지 않게 된 느낌이 어떤 것일까.. 복잡하게 얽혀있을 그의 심경을 감히 상상하기 힘듭니다만 여기서만큼은 그것이 자유인의 해방감이길 바랍니다. ‘사장을 3년씩이나 해먹었으면 할만큼 한거짐마’ 기분좋게 햄버거로 아침을 먹었습니다.

미세먼지 없는 날을 잡기를 잘했습니다. 매서운 칼 바람이었지만 남도의 바닷가엔 맑은 공기가 그득했습니다. '갈대길'을 걸으니 허파나 내장뿐만 아니라 뇌까지도 깨끗이 씻겨지는 느낌입니다.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무심히 걷다가 가끔 길동무와 이야기를 해도 좋습니다

친구의 배낭이 보물창고였습니다. 따뜻한 커피도 나오고 위스키도 나오더니 급기야 점심밥까지 나옵니다.매서운 바닷바람에 음식들이 멋대로 날아다녔지만 그래도 천하제일의 맛이었습니다. 숨차던 갈대길에서 벗어나 잠시 아스팔트길로 나온참에 버스 정류장에서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무심코 앉았었는데 나중에 보니 버스의 번호와 사람이 기막히게 맞는 장면이었습니다. 

살을 에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여섯시간을 걸었더니 녹초가 되었습니다다음 버스 오려면 50분, 택시를 부르면 40분.. 고민하던 찰나 아저씨 한분이 나서십니다. '갑시다. 트럭으로 국도까지 태워다 드릴텡께' 국도로 가면 버스가 좀 더 자주 있답니다. 맘씨좋은 아저씨의 트럭을 타고 국도까지 나왔습니다. 아주 오래전 통일로에서 자전거를 타다 지쳐서 트럭을 얻어타고 행주대교를 건너던 생각이 스칩니다. '좋은 여행들 하십시요' 아저씨의 따뜻한 말이 힘이 됩니다. 근데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안 옵니다.^^ 택시를 불렀습니다.


저녁으로 뜨거운 국밥을 먹고 열차에 오르니 그대로 잠에 빠집니다. 하지만 여수까지는 단 두정거장.. 부랴부랴 여수역에 내리니 처음 보는 낯선 광경이 섬뜩하게 우릴 맞습니다. 선로가 막혀있습니다. 더 이상 갈 길이 없습니다. 여기가 '끝'인 겁니다.

묘한 느낌입니다. 선로가 막혀있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누구에겐 이 모습이 이번 걷기 길의 테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을 겁니다.  


저도 그렇지만 친구도 이렇게 계획없이 아무렇게나 다녀본 건 이번이 처음이랍니다. 이런 것이 자유인의 특권이라 찬양했습니다. '여수 밤바다'가 보이는 곳을 찾다 포기하고 가까운데 들어가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 돌산섬으로 들어갔습니다. '순천만 갈대길'에 비하면 산악등반 수준인 '여수 갯가길'입니다.

어제도 그랬듯 걷고 또 걷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길을 걷는 걸겁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몇시간을 흘려보내도 전혀 마음이 조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조급하기는 커녕 그 '생각없음'으로 점점 더 행복해지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갯가길의 끝을 못봤습니다. 배가 고파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배낭을 맡기고 비무장으로 나왔는데, 오전에 들른 카페를 끝으로 구멍가게 하나 없었던 겁니다. 할 수없이 목적지를 한시간 남기고 먹을 것을 찾아 길을 빠져나왔습니다. '길 끝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목숨걸고 가겠냐. 끝이래야 또 다음길 시작인데..' 마을 노인정을 찾아갔습니다. 길도 묻고 과자라도 좀 얻으려.. 근데 할머니들도 과자가 없답니다. 이십여분 걸어나와서야 겨우 오뎅가게를 찾아서 오뎅으로 일단 목숨을 건지고, 여수로 이동해서 이순신버거로 배를 채웠습니다.  


여수역에 들어서서 기찻길을 보다 피식 웃음이 번졌습니다. 

어젯밤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끝'이라고 봤었던 그곳은 바로 '시작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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