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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한국대통령의 미국 신고식

1. 갑을관계

갑을은 계약서에 쓰이는 용어다. 회사 이름은 맨앞에 한번만 언급한 후, 이하 ()’이라 칭한다고 하고선, 이후부턴 ‘갑은 을에게..’ 이런 식으로 쓰는 거다. 일거리와 돈을 주는 회사가 늘 ‘갑’이라고 칭해지고, 재화나 노동을 제공해서 돈을 받는 회사는 늘 ‘을’이라 칭해지면서, 갑과 을의 '계약관계'가 세워진다. 말로는 '협업의 파트너십'이지만 실제론 권력의 우열에 의해 처절한 '상하관계'가 되어 버린다갑이 아무리 무리한 요구를 해도 을은 무조건 맞춰주는 불평등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계약관계를 완전히 깰 각오가 아니라면, 을은 치욕을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 남양유업의 새파란 영업사원이 나이든 대리점주에게 욕설과 폭언을 했단다. 철저한 갑을관계였기 때문이다

 

2. 신고합니다

ㅇㅇ는 ㅇㅇ일자로 ㅇㅇ를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진짜 사나이를 보다가 의문이 들었다. 토씨 하나 바뀌지 않는 저 신고를 군인들은 도대체 왜 하는 걸까? 제대한지 어언 30년만에 처음 가진 의문이다. 잠깐 생각한 후, 얻은 답은 이거였다. ‘상하관계인식'의 '강제주입. 즉 ‘저는 당신의 쫄따구입니다!..’ 물론 이것 말고 다른 이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3. 주청사

조선이 중국에 보냈던 사신중에 주청사(奏請使)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정치적 중대사안에 대한 보고 및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의 수령이 임무였다고 한다. '고명'은 황제국인 중국이 사대조공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나라의 새 왕을 승인해주는 임명장이었고, '인신'은 인감도장으로 쓰라고 주는 국새였다. 중국에 비해 턱없이 힘이 약했던 고려말과 조선시대엔 왕이 되고 나서 이렇게 중국의 승인’절차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치욕스런 역사다. 다행히 이건 아주 옛날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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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몇달 전 취임한 한국의 여자대통령이 지금 미국에 와 있다. 첫 해외 방문, 다른 나라 정상과의 첫 회담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부디 잘 하셔야 할텐데.. 동석하는 참모들이 정말 잘 커버해 줘야 할텐데.. 혹시 중국에 먼저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다행히 미국부터 왔다. 미국이 한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이니 당연하다고 본다. 


근데 이런 '취임 후 바로 미국방문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의 대통령들은 전두환때부터 한명의 예외도 없이 취임후 첫 해외방문국이 늘 미국이었다. 민주화투사 김대중과 김영삼도, 자주국방 노무현도 예외가 아니었다. 뼈속 친미 가카는 말할 것도 없고. 왜 그랬을까?

 

6·25 전쟁으로 우리나라와 미국은 우방국의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미국의 도움으로 공산화 위기에서는 벗어났지만, 북한보다 군사력이 약했던 우린 그 이후에도 미국의 보호가 필요했다. 1953년 시작된 한미군사동맹이다. 군사적 보호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원조가 초석이 되어 이만큼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린 모든 면에서 미국에 절대의존적이다. 얼마전 무산된 원자력 협정만 봐도 그렇다. 미국은 한국에게 우방 이상의 나라다.

 

한국의 대통령들이 취임 후 첫 해외방문지로 미국에 가는 이유.. 허울은 방문이지만 사실은 취임 인사’ 혹은 '취임 신고식'이었을 수도 있. (세계적으로 아마 우리나라와 이스라엘뿐이지 않나 싶다. 미국의 군사적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나라) 늘 '경제사절단'을 대거 대동하고 간다. 마치 경제협력이 방미의 가장 큰 목적이라는 걸 알리듯. 미국대통령을 대하는 한국대통령의 태도도 관심의 대상이 된다. 뻣뻣한 노무현을 easy man이라고 무시했느니, 살살대는 이명박은 friend라고 칭찬했느니, 휴가지에 초대를 받았느니 아니니가 한국 수구언론에 대서특필된다. 참 벨도 없다.

 

어쩔 수 없다. 우리의 군사적 보호국인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상, 혹은 고마운 우방에 대한 자발적인 예의상, 혹은 수십년간 이어져 온 외교 관례상 그래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한국대통령의 미국 취임인사’가 현실적으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지금은 북한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다. 더더욱 시의적절한 방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미국방문길에 오른 한국대통령을 보면서 왠지 주청사신고합니다갑을관계가 오버랩되며 씁쓸해 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미국에 살면서 세번째 보는 한국대통령의 신고식이다. 익숙해졌을 만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 오히려 그 그 씁쓸함이 더하다. 왜일까?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자대통령의 모습 때문일까?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에 취임인사 오지 않아도 되게끔 하는 방법은 딱 두가지다. 북한을 멸망시키거나 북한을 이웃 국가로 인정하면 된다. 남북간에 군사적 긴장관계만 해소되면 우리가 미국에 이 정도로 끌려다닐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근데 이게 너무 어렵다. 


'북한 멸망'이야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이웃국가로 인정 하는게 왜 어려울까? 미국 중국 일본이 원치 않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한만이라도 똘똘 뭉친다면 가능할 법도 한데 이건 더 어렵다. 방송에서 자길 '이상한 놈'으로 뽑은 진행자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그 방송국과 모기업을 느닷없이 '종북'으로 모는 희한한 놈, 자칭 '자유민주주의자' 혹은 '애국보수세력'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뇌의 대부분이 괴사하여 '종북몰이'밖에는 할줄 아는 게 없는 이런 싸이코 꼴통들 때문에, 앞으로도 한동안은 한국의 대통령들이 미국에 취임인사하러 계속 오셔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한국 대통령이 미국으로 취임인사 오지 않아도 되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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