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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31초의 선택

미식축구에서 터치다운(6)을 한 후에 두가지 선택이 있다. 20-yard 라인에서 1점짜리 킥(Extra Point)을 하느냐, 아니면 2-yard 라인에서 다시 공격을 해서 2(2 Point Conversion)을 노리느냐. 1점짜리 킥은 성공률이 거의 100%인 반면, 2점짜리 공격은 성공률이 40%정도라고 한다.

 

미식축구는 단 1초가 남아도 득점이 충분히 가능하다일단 공격이 시작되어 진행중이면 경기시간이 종료되어도 그 공격이 인정되기 때문에 롱패스나 러싱하나면 충분하. 이런 미식축구에서 타임아웃은.. 설명이 복잡해서 생략하지만.. 경기 시계를 멈출 수 있는 이 타임아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무기가 된다.

 

모든 팀 스포츠 종목에서 감독의 역할은 선수선발과 훈련 그리고 작전과 용병이다. 하지만 경기가 일단 시작되면 감독이 개입할 여지가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선수교체 정도다. 하지만 풋볼은 그렇지 않다. 경기가 시작된 후에도 거의 모든 순간들이 감독(코디네이터 포함)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 러쉬할까 패스할까,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펀트할까 밀어부칠까, 킥할까 2점 뒤집기할까.. 아무리 능력있고 경험많은 감독이라 해도 매 상황을 합리적으로 분석해서 판단을 내리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감에 의해 작전을 결정한다고 한다. 즉 복불복인 것이다.

 

일단 이 정도만 알아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1. 먼데이나잇풋볼 해설을 하는 Jon Gruden이 감독시절 이런 일이 있었다. 7점차로 뒤지던 경기에서 종료 일이초전 천금 같은 터치다운(6)을 했다. 이제 1점차다. 이 경우엔 생각할 것도 없이 1점짜리 킥을 해서 동점을 만든 후 연장전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그는 그 상황에서 2점 뒤집기 공격을 지시했다. 경기 패배로 어어지기 쉬운 무모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2점 뒤집기 공격을 성공시켜 연장전 없이 승리로 마무리해버렸다



2. 지난 토요일 플레이오프 게임, 정규시즌 소속리그 1위 Denver Broncos와 와일드카드로 겨우 올라온 Baltimore Ravens의 경기.. 115초를 남겨두고 브롱코스가 35:28로 앞서 있었다. 브롱코스의 승리가 거의 확정적이던 때, 브롱코스 수비수의 뼈아픈 실책으로 레이븐스가 극적인 터치다운을 성공했다. 점수는 35:34. 레이븐스 감독은 무리하지 않고 정석대로 엑스트라 포인트로 35:35 동점을 만들었다.

 

동점인 상황에서 브롱코스가 공격권을 넘겨받았다. 남은 시간은 31, 그리고 천금 같은 타임아웃이 두개. 그리고 현역 최고의 쿼터백인 Peyton Manning. 타임아웃으로 시간을 잘 활용해서 두세번의 패스로 전진한 후, 필드골(3)을 성공시키면 되는 상황이었다. 팬들도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브롱코스의 감독 John Fox가 느닷없이 공격을 포기한 것이다. 31초의 시간과 두번의 타임아웃을 그냥 허공에 버렸다. 그리곤 연장전으로 들어가더니 두번째 연장전에서 필드골을 얻어맞고 35:38로 패했다.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경기.. 브롱코스는 정규시즌 소속리그 1위의 팀이었고 내가 가장 응원하던 팀이었다. 감독 저 또라이 ^$#% 새끼가.. 나중에 감독의 설명(변명)으론 당시 선수들의 사기와 분위기상 괜히 시간에 쫓겨 공격을 하다가 실책을 범해 역전당할 것이 염려되어 그리했었던 거란다. 아무튼 브롱코스의 이 역전패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3. 이게 다가 아니었다. 그 다음날 벌어진 Seattle Seahawks와 Atlanta Falcons의 경기에서 기가 막힌 일이 또 일어났다. 경기내내 뒤지던 시혹스(역시 내가 응원하던 팀)가 경기종료 직전 터치다운과 엑스트라 포인트를 성공시켜 28:27로 역전에 성공했다. 어제의 울분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통쾌한 역전 드라마.. 남은 시간은 31. 팰컨스가 가진 타임아웃은 두개..

 

31초와 타임아웃 두개? 그랬다. 거짓말처럼 토요일의 경기와 닮아있었다. 킥오프 리턴후 팰컨스가 공격을 시작하려던 때 남은 시간은 25. 지고 있는 상황이니 팰컨스는 당연히 공격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두번의 롱패스로 필드골(3)이 가능한 거리까지 전진해 버렸다. 시혹스의 패색이 짙어지는 순간이었다. 킥커가 실수하기만을 바래야 하는 어려운 상황. 킥을 했다.. 그런데 볼이 골대를 벗어나 버렸다. 28:27 그대로 시혹스의 승리..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 킥이 무효란다. 킥 직전 시혹스 감독 Pete Carroll이 타임아웃을 불렀었단다. 킥커의 정신을 산만하게 하기 위해서 다들 하는 작전이다. 근데 이번엔 그게 재앙이었다. 다시 상대방에게 킥을 할 기회를 주고 말았고, 다시 필드골.. 띠바 이게 성공했다. 경기가 28:30로 뒤집히며 시혹스 패배. 100% 승리하는 경기가 감독의 타임아웃 콜로 인해 뒤집혀버린 것이다. 토요일보다 더 오금이 저리는 아쉬움. 하지만 킥 직전 타임아웃은 흔히들 하는 작전이니 감독을 탓할 건 아니다. 아쉬울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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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토리라고 해도 작위적이라고 느껴졌을만큼 기적 같은 경기들이었다Jon Gruden은 남들이 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가 승리하는 바람에 영웅이 되었었다. John Fox도 남들이 하지 않는 선택을 했지만 패배하는 바람에 욕을 먹었다. Pete Carroll은 비록 패배했지만 남들이 모두 하는 선택을 했었기 때문에 욕은 먹지 않았다. 다음 불똥이 튀었다. 팰컨스가 공격을 시도해 역전승을 하는 바람에 똑같은 상황에서 공격을 포기했었던 John Fox는 때려죽일 역적놈이 되어버렸다. 


Jon, John, Pete.. 특별히 유능하거나 무능한 감독들이 아니다. '복불복'일 뿐이다. 메시지는 이거다. ‘확률이 높은남들이 모두 하는 선택을 하느냐아니면 확률이 낮은남들이 하지 않는 선택을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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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기로에서 고민이 된다면 남들이 많이 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안전하다. 성공률도 높을 뿐더러 실패해도 욕은 먹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대개 남들이 다 하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은 종종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 나도 한번 이랬었던 것 같다. 바로 이민이다. 성공하면 아메리칸 드림’이지만 실패하면 평생 '인공위성'으로 떠돌아야 하는 이민. 다행히 지금은 이런 걸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지만.. 상당히 위험한 선택이었다.

 

감독들의 복불복, 순간의 선택으로 승패가 뒤바뀌는 극적인 NFL 게임 때문에 흥분했었다. 며칠 뒤 그 흥분이 가라앉자 진지하게 물어봤다요즈음 온갖 것들로 머리속이 그득한 사람에게. 


넌 어떤 길을 선택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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