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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Santa Ana 강풍이 몰고 온 '전기없는 세상'

한국에서 ‘강한 바람’은 여름철의 태풍이다. 폭우와 함께 휘몰아치는 무시무시한 바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태풍의 위력을 잘 모른다.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 대부분 튼튼한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람에 대해 공포감을 느낄 기회가 별로 없다.

반면 미국의 주택들은 대부분 목조주택들이다. 그래서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가 불어 닥치면 주택 전체가 날아가기도 한다. 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를 보면 흡사 폭격 맞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바람 무서운 걸 안다. 하지만 이것도 미국 남동부와 중부의 이야기다. 서부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걸 겪을 기회가 없다. 그래서 바람에 대한 공포감이 거의 없다.

하지만 남서부 지역에도 강한 바람이 부는 때가 있기는 있다. 바로 요즈음과 같은 초겨울 무렵이다. 로키 산맥과 시에라 네바다 산맥 사이에 위치한 Great Basin 지역의 고원 지대에서 형성되는 고기압이(차갑고 건조한 성질)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어 서쪽의 저지대로 불어오는 동안 온도와 밀도가 높은 바람으로 바뀌는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바람이다. 그렇다. 바로 우리가 어렸을 때 배웠던 ‘푄’현상, 즉 한국 봄철에 대관령을 넘어 서쪽으로 불어오는 그 '높새 바람'이다.

이 바람이 모하비 사막을 지나는 동안 더욱 건조해지고 밀도가 높아져 센 바람이 되는데, 평균 풍속이 허리케인과 맞먹는 50-60 mph, 심할 경우에는 100 mph에 이르기도 한단다. 이 바람이 서쪽의 저지대로 내려오는 동안 더욱 세어져서 남부 캘리포니아 산맥들의 골짜기 사이를 휘몰아치면서 태평양 바다로 빠져 나가게 된다. 이 강한 바람이 바로 Santa Ana Winds이다.

한국사람들이 가진 강풍의 기억은 거의 100% 비와 함께였던 태풍이다. 즉 ‘강한 바람은 비바람’인 것이다. 근데 이 샌타애나 바람은 다르다. 태풍처럼 엄청나게 센 바람이 부는데 그게 ‘건조하고 따뜻’한 거다. 이거 굉장히 이상하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게 얼마나 이상한지 그 느낌이 와 닿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바람을 처음 겼었을 때엔 받았던 느낌은 ‘기괴함’이었다. 이건 비단 한국인들만 받는 느낌이 아닌 모양이다. 이곳 사람들도 이 바람을 ‘Devil’s Winds 악마의 바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정도로 느낌이 이상한 바람이다.

지난 수요일 목요일 밤, 이 높새바람이 우리 동네에 불었다. 잠을 설칠 정도로 몰아치는 바람이었다. 추워서 일찍 잠이 깼다. 전기요의 온도를 높히려다 보니 전기요가 먹통이다. ‘정전’이었던 거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다가 불현듯 거라지 문이 생각났다. ‘저거 어떻게 열지?’ 한번도 그걸 수동으로 열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다닥 거라지로 향했다. 살펴보니 윗쪽에 끈 달린 손잡이 같은 게 보인다. 다행히 수동으로 문을 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걸 닫고 다시 열리지 않게 고정시키는 부분에서 약간 시간을 잡아먹었을 뿐. 곧 전기가 다시 오겠지. 별 걱정 없이 출근을 했다.

그러나 전기가 우리에게 다시 온 것은 그로부터 무려 '이틀 반' 후인 토요일 밤이었다. 샌타애나 강풍으로 워낙 넓은 지역에 전기가 끊어졌었기 때문에 늦어졌단다. 금요일 저녁 퇴근후 집에 오는데 동네에 전기가 다 들어와 있었다. 안심하고 올라오는데, 아뿔싸 딱 우리집부터 들어오지 않은 전기.. 바로 옆집까진 전기가 왔는데 우리집부터 위로 정전. ㅋ 그 지역 트랜스포머가 망가져서 그랬단다. 그래서 우리와 윗집들 일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하루 더 전기 없는 세상을 살아야만 했었다.

전기 없는 사흘.. 이렇게 오래도록 전기가 없는 세상은 어릴 적 시골 이모댁과 군대시절 이후 처음 겪어 본다. 모든 전기장치 당연히 먹통, 전기로 점화하는 보일러 먹통, 역시 전기로 점화하고 송풍하는 난방장치 먹통.. 그나마 물과 가스가 있어 음식만 겨우 해 먹었을 뿐, 정말 춥고 심심하고 답답했다. 백업배터리까지 다 닳아버린 ADT 시스템이 먹통이라 집을 비우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집을 지키고 앉아있긴 해야 하는데, 정말 할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정말 난생 처음 겪어보는 극단적인 심심함과 답답함이었다. ㅎ

생존에 필수적인 것, 1공기 2물 3음식.. 그리고 그 다음 4번은 아마 ‘전기’인 듯 싶었다. 
우리가 이렇게 전기에 심각하게 의존하고 산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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