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다른 집들은 다 음력설에 제사를 지내는데 우리들은 양력설에 제사를 지냈었다. 이유인 즉슨 우리 집안의 장손, 큰댁 형님께서 '양력을 쓰기로 한것은 국제사회의 약속이니 모두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셨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계신 마당에 장손의 이런 주장이 씨알이 먹혔던 것은 이분이 당시로선 드물게 미국유학을 다녀오신 번쩍번쩍한 미국박사인데다가 한국에 와서도 승승장구하면서 잘 나가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화려찬란한 장조카의 강력한 주장을 집안 어른들께서 자의반 타의반으로(속말로 하자면 끽소리 못하시고..^^) 엉겁결에 받아 들이시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꽤 오래전부터 양력설을 쇠기 시작했었다. 그 형님은 제에 올리는 술을 한때 ‘마주앙’으로 바꾸기까지 했었다. '조상님께도 새로 나온 좋은 술을 맛보실 기회를 드려야 한다'면서. 아무튼 어린시절 이렇게 진보적인 큰댁형님의 영향을 받아 난 단 한번도 한해의 시작이 양력 1월 1일임을 의심해 보지 않았었다. 사람 생활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게 달이야 해야? 당연히 해잖아. 그러니 당연히 양력을 따라야지..
언제인가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한겨울 어중간한 날(January 1st)을 한해의 시작이라고 정한 건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그 어중간한 날보다는 낮이 밤보다 더 길어지기 시작하는 때, 혹은 봄이 시작되는 무렵을 한해의 시작 1월 1일로 잡는 것이 오히려 훨씬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그래서 찾아보니 의외로 내 생각처럼 봄이 시작되는 무렵이 한해의 시작인 달력들이 많다. 동양에서 쓰던 음력이 그렇고 이스라엘의 종교력이 그렇다. 이뿐만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민속력은 모두 봄이 시작되는 무렵이 한해의 시작이다. 양력의 시초인 고대로마시대에서도 한해의 시작은 역시 봄기운이 오는 March였었다고 한다. 당시엔 일년이 10개의 월로 구성되어 있었고 March로 시작해서 December로 끝났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무슨 연유에선지 두가지 달을 새로 만들어 제일 앞으로 끼워넣었는데 그게 Janualis(January)와 Februalis(February)였으며 이때 한해의 시작이 March에서 January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렇게 고대 로마에서 January를 한해의 시작으로 잡았고 그것이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힘없는 다른 국가들은 그들의 달력을 버리고 뜬금없이 예수의 탄생년을 기원으로 하는 이 양력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력법이며 오늘날 국제사회에서의 가장 기초적인 약속이라지만, 왜 한겨울 중간의 어정쩡한 날이 한해의 시작이 되어야 하는지는 아직도 납득할 수 없다. 왜 January가 한해의 시작일까?
이건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다. 현시대 북반구에선 January가 한겨울 복판이지만 과거 고대로마의 어느 때엔 이때가 봄의 시작이었을 수도 있다. March가 시작이었다가 부랴부랴 두 달을 더 만들어 끼워 넣고 그 이름을 January라고 붙여 넣어 그때를 한해의 시작으로 삼은 것은 아마 원래는 March에 봄이 왔었는데 갑작스런 기후의 변화로 인해 봄이 훨씬 일찍 왔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다시 기후가 제자리로 돌아가 March에 봄이 왔지만 그땐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January를 한해의 시작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냥 그대로 냅뒀을 것이라고..
과거 다른 지역을 살펴보면.. 夏나라 역법에서는 한해의 시작이 음력 정월 1일이었다. 그러나 殷나라 때는 섣달, 周나라때는 동짓달을 한해의 첫달로 치기도 했었다고 한다. 또 한때 冬至를 한해의 시작으로 보았던 적이 있었다고 하며 어떤때에는 春分을 한해의 시작으로 보았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명리학에서는 지금도 立春을 한해의 시작으로 친다. 왜 이리 가지각색일까?
잠시 십이지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를 예로 들어보자. 子를 시작으로 亥로 끝나서 다시 子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당연히 하루의 시작은 子時로 시작해서 亥時로 끝난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일년 열두달도 당연히 子月로 시작해서 亥月로 끝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子月은 어이없게도 동짓달 11월이며 寅月이 정월이다.. 아마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를 한해의 시작으로 삼았던 때에 정해진 게 아닌가 한다. 나름대로 춘분을 시작으로 삼았던 것이나 입춘을 시작으로 삼은 것도 뭐 비슷한 연유들이 있겠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냥 이렇게 결론 짓기로 한다.
"한해의 시작은.. 시대에 따라 중요하게 생각되던 원칙과 개념에 따라 정하기 나름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봄의 시작과 함께 한해를 새로 시작하는게 훨씬 설득력은 있다."
봄과 함께 한해가 시작되는게 바로 음력이다. 십천간 십이지지 이런것들이 계절과 연결된 고대 중국 하북지역에서 寅月은 바로 木의 기운이 시작되는 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한이 소한집에 놀러왔다가 얼어죽었다'가 바로 이 차이때문에 발생한다. 고대 중국 하북지역의 기후와 현대 한반도의 기후차이.. 아무튼 한해의 시작을 봄으로 잡은 것으로 볼때 슬슬 음력이 오히려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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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양력과 음력이 정학히 뭘까? 양력은 태양을 기준으로 하는 역법, 음력은 달을 기준으로 하는 역법이라는 건 안다. 근데 자세히는 잘 모른다. 음력이 합리적인지 양력이 더 합리적인지 따져보자.
양력.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바퀴 도는데는 약 365.242196 일이 걸린다고 한다. 365일로 딱 맞춰지지 않는다. 왜 이런 오차가 생길까? 일년을 따지는 건 지구의 공전(해의 움직임)이며 하루를 따지는 건 지구의 자전(해의 움직임)이다. 월을 따지는 건 달의 변화, 즉 달과 지구의 움직임이다. 즉, 일 월 년이라는 것은 이렇게 달과 지구와 해의 움직임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언제나 어긋나는 자투리 시간이 남게 마련이다. 1 년을 365 일로 고정하면 4 년마다 약 1 일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4 년마다 한번씩 2 월을 하루 늘려서 29 일로 한다. 물론 그래도 오차가 생긴다. 그 이후까진 알 필요 없겠다.
음력의 기준인 달의 모양 순환주기는 약 29.53088 일이다. 그래서 음력에서는 한달이 29 일과 30 일로 반복된다. 그런데 이렇게 날짜를 정해 넘어가다 보면 1 년에 무려 약 11 일의 오차가 생긴다. 그래서 19 년에 7 번씩 윤달을 끼워넣어 일년을 13달로 하여 이 차이를 맞추어 준다. (우리가 요즈음 쓰는 음력은 정확히 말하면 음력이 아니다. 1 달은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하되 1년은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한다. 그래서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태음태양력이다.)
[많은 분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첫번째. '윤달'이라고 하면 4년에 한번씩 2월이 29이 되는 것만으로 알고 있는데, 더 중요한 윤달은 그게 아니라 이렇게 몇 년에 한번씩 월 하나가 통째로 낑겨드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선 전혀 모른다. 만세력을 봐야만 안다.]
오차가 생긴 날짜를 나중에 끼워 맞추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날짜의 오차’가 ‘계절의 오차’라는 데에 있다. 달력의 날짜만으로는 정확한 계절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날짜로는 봄인데 계절은 아직 겨울.. 이거 별거 아닌거 같아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겐 죽음이다. 그래서 도입된 것이 바로 입춘, 우수.. 등의 '24 절기'이다. 달력의 날짜만으론 계절이 도대체 어디쯤 왔는지 정확히 알수 없었으나 이 절기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계절을 정확히 알 수 있었고 그렇게 그것을 기준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많은 분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두번째. 이 24절기는 음력이 아니라 양력이다. 계절의 변화를 알기 위해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해 정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양력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하루정도 오차만 있거나 없거나 한다.]
보다시피 '4년에 하루'정도의 오차가 있는 양력이 '1년에 11일'이나 오차가 생기는 음력보다 훨씬 정교하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모든 국가가 양력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한해의 시작은 음력이 더 설득력이 있지만 정교함에 있어서 양력에 비할바가 못된다. 음력을 고집할 명분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나라에선 음력을 따진다.
가장 두드러진 게 '명절'과 '제사'와 '생일'이다.
→ 양력을 쓸까 음력을 쓸까? 1 – 한해의 시작은 왜 January?
→ 양력을 쓸까 음력을 쓸까? 2 – 명절 제사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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