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한부 인생이다. 하지만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 아직까진 죽음을 그저 먼 훗날의 일, 솔직히 말하면 내겐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로 여기며 덮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분을 떠나 보낼 때 잠시 죽음을 실감하지만 곧 잊는다. 나도 언젠간 죽는다.. 하면서도 실제론 전혀 실감하지 않는다.
죽음을 가까이 인식하게 된 계기가 내게 하나 있었다. 팔십중반의 할머니.. 주무시기 전에 항상 목욕을 깨끗이 하고 깨끗한 속옷을 꺼내 입고 잠자리에 드신다고 했다. ‘왜 그러시는 건데요?’ 여쭤봤다. 무심한 그 질문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오늘밤 갑자기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아니 말문이 막힌 게 아니라 숨이 턱 막혔다. 그렇구나 죽음이 오늘밤 갑자기 닥칠 수도 있구나.. 그 ‘오늘 밤’의 죽음을 할머니는 매일 준비하시는 거였다. ‘시체를 들춰보는데 속옷이 더럽거나 몸에서 냄새가 나면 사람들이 얼마나 흉보겠어요?’.. 할머닌 죽음의 그림자를 하루 종일 생활에 드리운 채 살고 계셨지만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잔잔히 준비하고 계셨다. 며칠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나에게도 언젠가 저렇게 죽음을 가까이 인식하며 살게 될 날이 올 터.. 그 무렵 내게 큰 변화가 하나 있게 될 것이다. 나도 드디어 종교를 가지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걸 마약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도 나이를 먹으면 나도 결국 그 마약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 것이다.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도 뭔가가 틀림없이 있다’고 하는 마약에 스스로 중독될 것이다. 그리고 ‘봉사활동’도 기웃거리게 될 것이다. 죽음 이후를 위해서라면 이 ‘봉사’만한 ‘보험’이 없지.. 하면서. 이렇게 나도 나이가 들면 ‘언젠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곧 닥쳐올 죽음’과 죽음 이후를 대비할 것이다.
내게 ‘산 날’이 많은지 ‘살 날’이 많은지 황급히 따져본다. 특별히 장수하지 않는 한 내겐 살 날이 더 적다. 살아온 날 되짚으니 일이분만에 끝나버리는데 살 날은 그것보다도 적게 남아 있다니.. 마음이 급해진다. 이거 하루하루 매 시간시간을 함부로 흘려보낼 게 아니다. 하고 싶었던 거 미루고 있던 게 뭐였는지, 해야 할일 잊고 있었던 게 뭐였는지 종종히 따져보게 된다. 나중에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 움직임 자체가 불편해질 세월까지 감안하면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그야말로 얼마 되지 않을 듯싶다. 몸도 제대로 못 움직이면서 현대의학으로 생명만 연장하며 사는 노인들을 얼마나 많이 보는가?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 병원순례인 노인들.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늘리는 방법은 음식 더 조심하고 운동 더 많이 하는 수 밖엔 없겠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앓지 말고 바로 가야겠다.
그렇다. 이렇게 가끔 자기가 시한부 인생임을 일깨우는 것도 인생에 좋은 의미의 각성제가 될 수도 있겠다. 앞으로도 가끔 내 자신에게 시한부 인생임을 일깨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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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갑자기 진단이 내려졌다고 하자.
1. 암의 진단이 내려졌다. 본인에게 알려야 할까?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얘길 들으면 사람들은 보통 세가지의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첫번째, 강한 부정과 분노의 단계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기 때문에 병 자체를 부정하고 주변을 원망하고 급기야 신을 원망한다. 두번째, 이해의 단계다. 병이 왜 발생했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간의 스트레스나 유전적 영향, 식습관 생활습관 등과 연관 짓고, 자신이 해석한 암의 의미에 따라 자신의 생활에 있어서의 우선 순위를 조정하여 이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구분한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 그리고 세상의 작은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세번째, 해결의 단계다. 암과의 싸움에 자발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암치료에 대한 정보를 구하고, 모든 치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므로 하루라도 빨리 환자 본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2. 육개월이 남은 인생의 전부라고 한다. 이때에도 사실을 본인에게 알려야 할까?
시한부가 아닌 경우라면 중병이나 불치병이라 할지라도 환자는 기본적으로 자기의 병을 알 권리가 있다. 의사는 환자의 이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하며 가족도 환자를 속여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병에 대한 본인의 확실한 인지가 ‘살고 싶다’는 의지를 더 강하게 솟게 만들어 치료율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환자에게 병을 알리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치료 가능성이 없는 시한부 선고의 경우.. 자신의 삶이 육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접하게 되면 환자는 부정과 분노의 단계도 없이 곧바로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할 것이다. 무시무시한 죽음의 공포로 처절하게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충격으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오히려 일찍 숨을 거둘 수도 있다는 걱정도 있을 터, 본인에게 차마 알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옳은 판단일까? 누구에게나 죽기 전 정리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있다.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처리해야 할 현실적인 일들이 있다. 또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 수도 있고,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던 사람에게 사죄를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가슴에 품었던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야 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동안 못한 모든 사랑을 표현해야 할 수도 있다. 원수를 찾아가 기어이 복수를 해야 할 수도 있고, 몸을 불살라 사회의 정의를 외치며 불꽃처럼 스러질 수도 있다. 이 짧은 기간이야 말로 마음속 깊이 원하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짧은 생을 훨씬 더 보람 있고 뜻있게 사용할 수 있다. 어떻게 죽느냐는 반드시 본인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환자가 받을 충격 때문에 환자가 너무 불쌍해서 사실을 속이는 것은 환자로 하여금 가장 귀중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권리를 빼앗는 것이 된다. 잔인한 통보가 되겠지만 하루 빨리 시한부임을 알리고 환자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맞다고 본다.
3. 남은 시간이 한달이라고 한다. 역시 이때에도 본인에게 알려야 할까?
답답해 진다. 한 달이라면 이건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안정을 찾고, 인생을 차근차근 정리할 시간 자체가 아예 되지 못한다. 괜히 사실을 알렸다간 그저 한달 내내 무시무시한 죽음의 공포에 억눌리며 원망하다가 그냥 고통스럽게 스러질지도 모른다. 남았다던 한달은 커녕 충격으로 며칠만에 급사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라리 그냥 먹고 싶은 거 먹게 하며,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게 하다가 아무것도 모른 채 갑자기 죽음과 맞닥뜨리게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꿈에라도 자기가 죽을 것을 모르는 환자에게, 기어이 병을 이기려고 힘들게 노력하는 환자에게 어떻게 ‘너 앞으로 한달정도밖엔 못 살아’ 이렇게 말한단 말인가. 그렇게 잔인한 짓은 도저히 할 수 없다. 그냥 죽음에 대한 공포 없이 인생을 마무리 할 수 있게 배려해 주는 것이 낫겠다.
하지만 만약 그가 수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던 특별한 사람이라도 역시 마찬가지일까? 그냥 우리끼리 그 사람의 인생을 마무리해도 될까? 아무런 준비나 정리도 없이 갑자기 혼수상태를 거쳐 죽음으로 스러지게해도 될까? 황망하게 육신에서 빠져나올 그의 영혼.. 혹시 소스라치지 않을까?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에,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에 아쉬움과 회한이 크지 않을까?
그는 어쩌면.. 마지막으로 꼭 가졌어야 했을 소중한 기회를 빼앗아버린 가족들과 친구들을 너그럽게 이해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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