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중년' 이란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 '우리같은 중년의 남자들이..' 그냥 들어 넘겼지만 사실 그 중년이란 말이 난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우리가 벌써 중년은 무슨 중년? 양심불량하게스리 아직도 청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중년이라는 말에는 거부감이 분명히 있었다. 근데 그 친구는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었다. 아마 위계질서 분명한 한국의 조직에 속해 있어서 일부러 나이먹은 체를 해서인가 보다. 조직에서 이제 윗사람은 별로 없고 아랫사람들이 우글우글하기 시작한 지 꽤 되었을테니까.
도대체 몇살무렵이 중년일까? 사전적 의미에서 중년은 ‘마흔 안팎의 나이’라고 한다. 마흔 안팎이라면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까지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난 벌써 중년을 지났다. 이거 현실성이 전혀 없다. 삼십대 후반부터 중년? 난 그 나이때 아예 나이자체를 실감하지 않았었는데, 그냥 '철없는 얼라'였을 뿐이었는데.. 근데 그때부터가 중년이었다니 이건 아니다. 수명이 짧았던 옛날엔 마흔 안팎이 중년이었는지 몰라도 요즘은 아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언제가 중년일까. 중년의 중자가 가운데 中이라면 이는 인생의 중간이라는 말일 터. 한국인의 평균수명을 찾아보니 남자 75세 여자 80세다. 나누기 2를 하면.. 띠바. 맞다. 마흔안팎이 중년 맞다. 딱 中年 (middle age)이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중년과 ‘인생의 중간’이라는 이 중년은 괴리감이 확실히 있다. 우리가 쓰는 중년의 중은 아무래도 中이 아니라 무거울 重에 가까워 보인다. 重年, 중후함이 묻어 나오는 나이. 하지만 마흔 안팎의 나이에는 인생의 중후함이 묻어 나올 리 없다. 만약 그 나이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상당히 느끼하거나 재수없는 사람일 것이다. 정상적인 마흔 안팎이라면 중후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重年은 마흔보다는 훨씬 뒤일 것 같다.
그래서 ‘적어도 오십은 넘어야 중년’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 어렸을 때 보던 오십 넘은 아저씨 아줌마들은 정말 무게 있는 중년이었다. 따라서 '오십이 중년'이란 말에 거부할 수는 없겠다. 근데 내게 맞춰보니 ‘오십 중년’ 역시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 지금 추세로 봐서는 몇 년 남지도 않은 오십이 되어도 난 별로 더 중후해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남이 봐서는 중년이라고 혹시 여길지 몰라도 속은 여전히 철없는 얼라일 것이 분명하다. 주변의 오십들을 봐도 그들 역시 전혀 중년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나랑 비슷한 고만고만한 얼라들로 보인다. 그럼 스스로가 수긍하는 중년은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자식들 출가시키고 손주를 볼 때쯤?
몸과 마음은 따로 나이를 먹고, 늙은이의 기준역시 자기가 늙어가면서 따라서 올라간다. 자기가 느끼는 ‘늙은 나이’는 늘 내 나이로부터 일정하게 떨어진 나이이다. 그래서 어렸을땐 마흔살 아저씨도 중늙은이로 보더니 요즈음엔 마흔짜리들은 아예 얼라로 보이고 예순쯤 되어야 아저씨로 보인다. 자기 나이 듦을 인식한다는 것이 이렇게 절대적으로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이 몇살부터가 중년인지 답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른 방향에서 접근을 해보자. ‘늙었다고 인식할 때’ 그때가 바로 중년이라고 하자. 여기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늙었다는 걸 언제부터 인식할까? 나는 내가 늙었다는 걸 '몸'으로는 이미 인식한다. 예전 같았으면 하루이틀이면 아물었을 작은 상처도 요즈음엔 일주일은 족히 걸린다. 밤을 새우고 술을 마셔도 담날 생활이 별로 불편하지 않더니 이젠 술을 좀 마시면 삼사일은 고생을 해야 몸이 풀린다. 좀 불편하기만 할뿐 전혀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던 감기가 요즈음엔 걸렸다하면 죽을똥 살똥 고생을 한다. 운동을 하다가 다치면 적어도 육개월이상 지나야 낫든지 아니면 아예 낫질 않아서 그냥 불편한 채로 그대로 가지고 산다. 친구들은 이제 웬만한 성인병 하나씩은 다 달고들 있으며 술자리 화제도 건강문제가 상당부분 차지한다. 이렇게 내 몸이 늙었다고 처음 느낀 때가 아마 마흔무렵이었다. 그래서 몸으로만 본다면 ‘몸나이 마흔이 중년’ 맞다.
근데 마음은 아니다. 마음은 ‘아직도’ 서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야’ 서른이다. 김광석의 ‘서른즈음에’ 라는 가사를 이제서야 공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팡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력을 쓸까 음력을 쓸까 2 - 명절 제사 생일 (0) | 2008.01.06 |
---|---|
양력을 쓸까 음력을 쓸까 1 - 한해의 시작은 왜 January? (0) | 2008.01.05 |
내 죽음을 내가 몰라야 하나? - 이영훈 작곡가 (0) | 2007.12.03 |
간통죄 5 - 모든게 무의미 (0) | 2007.11.10 |
간통죄 4 - 오로지 복수의 수단 (0) | 2007.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