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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불놀이 1

한 겨울 강원도 철원의 바람은 참으로 매섭다. 그 추위속, 그 바람속에 혹시라도 들판에서 한가로이 거닐다간 정신이 몽롱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매서운 추위도 한동안 지내다 보면 어느덧 그런대로 적응이 되는데, 예를 들면 날씨가 유난히 따뜻한 거 같아 온도계를 봤는데 눈금이 영하 15도 정도 가리키고 있었다면, ‘어쩐지 푹- 하더라니’ 이런 식이다.

혹한기 훈련이라는 게 아마 이런 매서운 추위에 병사들을 길들이기 위한 것이겠다. 보통 겨울중 가장 추운때를 골라 12월말 즈음에 한번하는데 약 일주일 정도이다. 그 기간동안에는 한번 부대밖을 나가면 오로지 밖에서만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훈련의 이름마따나 추위와 싸우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 되겠다.

낮에 추운거야 겨울이니 당연히 그러려니 하지만 밤에 추운 것이 항상 괴로운 문제다. 잠을 잘때만이라도 조금 덜 추웠으면 좋으련만, 추워서 잠을 잘 못자는 것은 진짜로 견디기가 참 힘든 것이다.

그래서 군인들 월동준비에 꼭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혹한기 훈련을 대비한 분침호의 정비이다. 분침호가 없는 지역에서는 할 수 없이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지만 분침호가 있는 지역에서는 이 분침호에서 잠을 자기 때문이다. 맨땅의 텐트보다는 분침호가 천국이다.

산 위에 있는 경우엔 반쯤 굴을 파서 그 안을 짚과 가마니로 두르고, 들판인 경우엔 나무를 세워서 틀을 잡고, 그 전체를 가마니 같은 거나 짚단(그냥 짚단이 아니라 부르는 이름이 있는데 이름을 잊어먹었다)으로 엮고, 바깥을 옥수수 가지나 말라 죽은 나무들로 위장한다.

가장 중요한 곳은 바닥이다. 겨울밤 바닥의 냉기를 가능한 한 차단하기 위해 나무와 짚을 이용하여 몇겹으로 바닥을 깐다. 자기가 이곳에서 겨울밤을 보낼 것이니 가능한 바람구멍을 막으려 손길이 세세해 진다. 초겨울 낮에 분침호를 완성하고 안에 들어가 가만 앉아 있으면 밖에서 아무런 바람도 들어오지 않는 아주 포근한 공간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겨울밤엔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안에 난방장치가 있는 것이 아니니 이 분침호는 그저 겨울 밤의 그 매서운 찬바람만 직접 맞지 않게 살짝 피하는 곳이다. 분침호 안이라도 기온은 영하이며 수통의 물은 당연히 언다. 그래도 혹한기 훈련때 이 분침호는 상당한 위안이 된다. 아무리 썰렁한 분침호이지만 훈련을 끝내고 들어올땐 따뜻한 내무반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돌덩어리인지 신발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얼어붙은 군화도 벗을 수 있고 몰래 짱 박아둔 소주도 한잔 할 수 있다. 가끔 싸리나무 꺾어다가 그 안에서 초미니 모닥불을 피우기도 한다. 걸리면 끝장이다. 불빛만 새어나가지 않게 하면 된다. 바깥에서 싸리나무를 태울때면 연기가 전혀 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막힌 공간에서 불을 붙이면 아무리 싸리나무라 할지라도 연기가 있다. 그래도 그 뜨거운 온기가 좋아서 눈물을 흘려가며 그 불 주위에 촘촘히 앉아들 있다. 물론 고참들만.



민통선 통문초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 오리쯤 가면 그동안 길과 나란히 가던 개울과 직각으로 만나는 큰 개울이 하나 흐르는데 그 이름이 남대천이다. 이상하게도 강원도의 개울엔 남대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 참 많다. 그 남대천을 따라 평행으로 큰 둑이 쌓여져 있고 그 뒤에 피리의 구멍들처럼 참호(다른 용어가 있었는데 잊어먹었다)들이 군데군데 뚫려 있다.

어느날 낮에 무참한 방법으로 들고양이를 잡아 끓여먹은 병사들이 그날밤에 무시무시한 고양이들 울음소리에 날밤을 지새던 바로 그 구멍들이다. 그 바로 뒤는 수박밭이어서 여름엔 매복조들의 수박파티가 열리곤 했었는데, 다행히 한여름동안 수박 몇십통쯤 없어져도 밭의 주인은 그리 뭐라 하지는 않는다. 군부대 지역에서 군인들과 마찰 일으키지 않고 살아가는 공존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 수박밭 한쪽 끝에 위장을 한 분침호가 하나 있다. 그해 초겨울에도 일년내내 비바람에 쩔은 오래된 볏짚들을 걷어내고 이곳도 바짝 잘 마른 푹신푹신한 볏단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작업이 모두 끝나면 안에 들어가서 잠시 널부러져 있다가 나오곤 했는데, 낮잠을 자려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바람 들어오는 구멍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찾아보는 거였다. 바람새는 틈이 전혀 보이지 않을때 작업을 철수한다. 남들이 사용하는 분침호라면 이렇게 철저하게 하지 않을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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