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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불놀이 2

혹한기 훈련이 끝나면 한동안 하루 일과전체를 연병장에서 지루한 교육훈련으로 보내는 시기가 있다. 이 시기에 고참들은 자진해서 매복조에 자원을 한다. 훈련은 때에 따라선 재미라도 있을 수 있고 몰래 찌그러지는 요령이라도 있지만 일방적인 연병장 교육훈련은 고참들에게 오히려 더 힘들 수도 있나 보다.

매복은 낮과 밤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분대별로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들어가는 것이 원칙인데 이때만큼은 분대 구분 없이 고참들끼리만 분대를 하나 만들어서 말뚝으로 매복에 들어간다. 대부분 말년병장들이었는데 웬일인지 중대장도 그냥 눈감아 주었다.


일반적으로 매복작전 들어가기 전에 오후취침, 매복작전을 끝내고 다음날 오전내내 취침을 한다. 따라서 매복 한번 뛰면 오후취침에 다음날 오전취침까지 따뜻한 모포안에서 뒹굴 수 있기 때문에 겨울날 매복작전은 고참들의 독차지였다. 게다가 DMZ매복처럼 소대장이나 선임하사가 조장인 것도 아니다. 그냥 분대장이 조장이다. 어차피 똑 같은 말년들이다. 거리낄 게 하나도 없다.

어느정도 긴장해야 하는 DMZ 매복에 익숙해 있던 병사들에게 FEBA지역 매복은 그냥 아이들 장난일 뿐이다. 아무런 긴장감도 아무런 두려움도 없다. 그저 들어가서 자고, 나와서 또 자는 소일거리일 뿐이다.


전체 매복조 인원은 여덟명. 그중 한명은 말년이 아니다. 모두가 말년 고참일색이면 잔심부름할 손이 없기 때문에 쫄다구를 하나 데리고 들어간다. 대부분 고참일병이나 신참상병들이 이에 해당되겠다.


1984년 1월 3일.
매복조 전담쫄다구 상병 하나가 마침 휴가나가고 없고 또하나는 감기에 걸려 겔겔거릴때에 처음으로 공일병이 간택되었다. 탁월한 산토끼 솜씨를 그전부터 인정받은 터라 차기 매복조로 일찌감치부터 선택된 병사다.

매복조에 편성이 되자 공일병의 오후일과는 대부분 열외가 된다. 할일이 무척 많기 때문이다. 저녁 먹기 전에 모든 군장준비를 다 마치고, 저녁 먹고 매복에 투입되기 직전까지 그 짧은 시간내에 얼어붙은 개울을 건너 민가까지 가서 연회에 쓸 것들을 사오고 그것을 매복조 지나가는 길가에 숨겨두고, 그리고야 다시 들어와 매복조 검열에 참가해야 한다.

해가 떨어진 이후의 군부대 주변은 적적막막 그 자체다. 그날도 익숙한 몸놀림으로 울타리를 뛰어넘어 민가로 향한다. 오로지 멀리 보이는 불빛만 따라 개울주변 거친 덤불 숲을 헤치고 얼어붙은 개울을 건너간다. 댓병 소주 하나와 안주거리 이것저것.. 이력이 붙은 공일병은 그 와중에 주인아줌마에게 부탁해서 소주 몇잔을 반주삼아 사제 라면 한그릇을 해치운다. 저녁먹은 지가 불과 한시간도 안 지났는데 사제 라면맛이 꿀맛이다. 바로 이 맛에 아슬아슬한 이 짓을 한다.

물건들을 들고 다시 강을 건너는데 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다가오는게 보인다. 어떤 높은 넘 하나가 민통선 통문초소 점검차 가는가 보다. 달빛이 내리고 얼어붙어 눈쌓인 개울 위는 그야말로 조명발 함박 받은 무대와 같은 곳, 어설프게 도망가거나 움직이면 멀리서도 바로 시야에 잡힌다. 곧바로 납작 수그려 돌덩어리인 척 멈춘다. 이런게 기술이다.

방금 지나간 짚차가 이삼분도 안되어 다시 돌아 나온다. 이번엔 길가 덤불숲에 몸을 숨긴다.
도장만 찍고 바로 나가는 구나.. 장교쉐이들..

라면이 좀 늦게 나오고 짚차때문에 지체가 되어 부대에 돌아와 보니 벌써 군장검사가 시작되려고 한다.
당직사관 장교가 냅다 소릴 지른다. 쫄다구새끼가 빠져서 제일 늦는다고. 하늘같은 고참들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무언의 격려를 보내준다.


매복투입 당시의 온도가 영하 20도 이하가 아니면 매복은 예정대로 투입된다. 투입시 영하 19도 였다가 새벽녘에 영하 30~40도 떨어지는 건 예사다. 실탄과 각종 무기들을 지급받는다. 일인당 실탄 105발, 수류탄 두개, 크레모아 두개.. 그리고 203유탄발사기를 가진 넘에게 따로 그 포알. 받을 때마다 느끼지만 일개 분대의 화력치곤 대단한 화력이다.

매복조 군장 검열이 시작된다. 그냥 통과의례다. 말년병장들만 즐비한 매복조에 신참 소대장이 할게 별로 없다. 군장검열에서 모포나 라이터, 담배를 걸리는 넘은 한넘도 없다. 병사들만 아는 장소가 있다. 거기에 다 있다. 모포, 침낭, 라이터, 담배 그리고 음식들. 이동하는 도중 챙기면 된다.

위병소를 통과해 민통선 통문초소까지 이동하는 동안 공일병이 무전 통신상태를 체크한다.
‘특무대, 특무대.. 여기는 두더지, 여기는 두더지.. 감도 체크바람, 이상’
수색조를 칭할땐 뻐꾸기, 매복조를 칭할땐 두더지라고 했다.
‘감도 다섯개, 아주 좋다. 추운데 수고하기 바란다. 이상’
웬일로 이넘이 수고하란 말까지 덧붙인다. 불친절하기 짝이 없던 넘이 별일이다.


매복조가 이동하는 도로를 막고 선 민통선 통문은 아주 단촐하다. 민간인 차량이 접근할 수 있는 다른 민통선 통문처럼 어마어마한 초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DMZ 통문처럼 까다롭지도 않다. 자그마한 초소 한 개에 통문장교도 없고 다들 같은 소속 병사들만 셋이 지키고 섰다. 매복조가 근처로 다가가면 알아보고 먼저 매복조 고참들에게 경례를 한다. 그날 통문초소 근무는 공일병과 친하던 병사가 하나 있다.

‘공일병님 추운데 수고 하십쇼..’ ‘그래 너도 수고해라’

통문을 통과해 매복진지를 향해 걸어가는데 조용히 눈이 나리기 시작한다.
'어 눈이 오네?'

군발이에게 눈은 저주스런 것인데 그날 그 밤의 눈은 아주 포근하다.
다음날 눈을 치울 필요가 없어서 그랬을까..

군인임을 잠시 잊고 내리는 눈을 맞으면서 잡생각들을 한다.
아 저 쉐이들이 군발이 고참들이 아니고 친구들이라면 이거 을매나 재밌을까..

눈 오는 겨울밤에 나가는 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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