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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불놀이 4

‘그만 해골들 굴리자고’ 왕고참의 말에 차례대로 따뜻한 가운데부터 고참순으로 자리를 잡는다. 고참들 중 쫄다구가 양끝에 자리를 잡는다.

공일병의 자리는 없다. 초번초 불침번이기 때문이다.
‘어이 수고해라. 무전 오면 잘 받고, 순찰 오는 거.. 그거만 잘 봐라. 그리고 시간되면 다음 사람 깨우고’ 그러나 공일병은 자기가 말뚝임을 잘 안다. 깨운다고 일어날 자들이 아니다.

시간은 기껏해야 열두시.. 네시반까지 혼자서 버텨야 한다. 머하고 노나..
혼자서 심심하게 버티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추위와의 싸움이다. 비록 분침호 안이지만 실내온도는 물론 영하다. 바깥이 영하 삼십도가 넘고 그 밖과 안은 가마니때기 한장의 두께인데 분침호 내부가 따뜻할 리가 없다. 도로쪽 순찰이 오나 안오나 보려고 뚫어놓은 구멍에서 찬바람이 씽씽 들어온다. 저 구멍을 막아버릴 수도 없고..

옆 사람의 체온이 없으면 버티기가 힘든 추위다. 공일병은 담요한장 달랑 둘러쓰고 버틴다.
양말 세겹에 사제내복 속에 입고 군용내복 겹으로 하나 더입고, 그위에 군용추리링 더 껴입고 바지를 입었고, 윗도리엔 방한조끼에 야전잠바 방한복에 목도리에 방한모를 둘러 썼고,그 위로 담요한장 더 둘러 썼지만 뼛속까지 스미는 그 추위는 어쩔 수가 없다.

‘DMZ 에서는 이 추위에도 들판에서 판초 하나 둘러쓰고 그냥 앉아서 버텼다. 그에 비하면 지금 이곳은 호텔이나 다름없다. 감지덕지로 생각하자. 바람이라도 막을 수 있고 덮을 담요쪼가리라도 하나 있는걸.’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당장 춥다. 다닥다닥 붙어서 색색거리며 자는 쉐이들을 보니까 더 춥고, 자꾸만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발이 시리다. 아참.. 멍청하게 아직까지 군화를 신고 있네. 자는 넘들이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군화를 신고 잔다지만 나야 벗고 있어도 되잖아.. 공일병이 군화를 벗어 한쪽에 놓고 언 발을 주무른다. 그래도 발은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한 삼십분 흘렀을까.. 추위만으로도 힘든데 졸음까지 겹쳐오니 견디기가 더 어렵다.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끄는 그 찰나에도 그 라이터 불의 온기가 따뜻하다. 라이터를 또 켰다. 그 불기에 반대쪽 손을 녹인다. 너무 가까이 대고 있다가 장갑끝이 조금 탔다. 아 씨바 얼마전에 집에서 새로 보내준건데.. 속상하다. 그냥 군용장갑 낄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라이타불을 너무 오래 켜고 있으니 라이타에서 불똥이 뚝뚝 떨어진다. 이러다 터질라.. 다른거 없을까 둘러보니 흩어진 지푸라기 부스래기들이 있다. 한줌 모아놓고 불을 붙이니 순식간에 불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손을 쬐고 할 겨를조차 없다. 바짝 마른 지푸라기들이라 장작으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다.

그래도 잠깐동안만이라도 불이 있다는 게 어디냐.. 주변에 손이 닿는 곳의 모든 지푸라기 부스러기들을 뜯어다가 불을 붙인다. 서너번 그짓을 하니 그나마 이젠 부스러기조차도 없다.
따뜻하라고만 한게 아니었다. 심심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제 심심하다. 심심하니 추위가 더욱 시리게 느껴진다. 다시 라이타불을 켠다. 최고로 올리니 불이 꽤 쎄게 나온다. 그래봐야 역시 라이타불은 감질난다.

바닥에 들이대자 부풀어 오른 지푸라기들에 순간적으로 불이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사그러진다. 그렇게 불이 한번지나간 자리는 보푸래기 전혀 없는 깨끗한 바닥이 된다. 내 주변의 바닥은 그렇게 깨끗해졌다.

문득 눈이 벽으로 옮겨갔다. 보푸래기가 잔뜩 일어나 보기가 안좋다. 저것도 정리하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라이타불을 벽에 들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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