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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불놀이 5

불이 붙는다.
지푸라기가 그러하듯이 순식간에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사그러들겠지.

그러나 아니었다. 불은 위로 향한다. 바로 꺼질거라고 생각했던 불은 삽시간에 벽을 타고 위로 치솟는다. 깜짝 놀란 공일병은 스프링처럼 튀어 일어나 맨손으로 불을 끈다. 그러나 그 불은 이미 한 사람의 손으로 제어할 수 있는 그런 불이 아니었다. 불길이 점점 커지며 위로 위로 향하기만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불은 이미 천정까지 솟아 올라가고 있다. 불 끄기를 포기한 공일병이 ‘불이야’ 소릴 지른다.

자다말고 느닷없이 불이라는 고함에 일어난 병사들이 눈앞을 뒤덮은 불길을 보자 아연실색한다. 불길이 벌써 한쪽 벽을 뒤덮고 천정의 3분의 1을 뒤덮었다. 이제는 불을 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살아 남느냐의 문제로 바뀐다.

‘장비 챙겨’
분대장의 다급한 외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천정을 덮었던 불길이 이제는 폭포수처럼 천정을 이끌고 떨어지기 시작한다. 분침호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던 천정의 굵은 나무에 옮겨붙기 시작한 모양이다. 시간이 없다. 이제는 바닥에서도 불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바닥은 더더욱 굵은 나무들이 많이 깔려 있다. 곧 불은 더욱 커질터.

‘총만 챙겨서 빨리 바깥으로 튀어라’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인데 공일병에게는 그 장면들이 한장한장 필름 돌아가듯이 느껴진다. 머리속이 멍해지더니 급기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생각자체가 없어진다. 초대형사고를 저지르니 오히려 이렇게 마음이 평정해진다. 눈 앞으로 불폭포가 떨어지고 발 밑에서 불이 치솟아도 전혀 무섭거나 뜨겁지 않다.

고참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무조건 멀리 뛰어’
모두들 뛴다. 그러나 공일병은 다시 분침호로 들어간다.
‘야 이새끼야 너 미쳤어’
‘크레모아라도 가지고 나와야죠’
‘튀어나와 이새끼야.. 여기서 죽어’

뛰었다. 오륙초쯤 뛰었을까.. 첫번째 폭발음이 들렸다. 달리면서 돌아보니 불기둥이 솟았다 내려간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구나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죽겠구나..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연달아 폭발음이 귀를 찢는다. 소총의 실탄들이 터지기 시작했는지 이번에는 기관총 쏘는 듯 연결폭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수류탄 파편에 맞을까 탄두에 맞을까, 뛰면서도 반사적으로 몸을 굽힌다.

남대천 방둑끝 콘크리트 벽 뒤쪽으로 모두들 몸을 숨겼다. 그러나 공일병은 넋이 나간채 그냥 둑 앞으로 나와 섰다.

엊그제가 설날이었는데.. 왜 설날생각이 났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설날을 생각했다. 한겨울 밤하늘에 펼쳐지는 대폭발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얼마나 센지 그 열기가 얼굴에 느껴진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것들이 현실이라고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아마 꿈일거야..

또 실탄들이 날아다니는지 어지럽게 불꽃들이 휘날린다. 이어서 또 큰 폭발이 있다.
분침호 전체가 불길로 활활 타오르고 그 사이 사이에 폭발의 화염이 치솟고..

하늘을 찢는듯한 폭발이 있다. 아마 크레모아가 터지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그 화염과 함께 커다란 불씨들이 상당히 멀리까지 날아간다. 우리가 몸을 피한 곳까지 불꽃들이 날아온다. 시뻘겋게 불이 붙은 나무조각들이다. 콘크리트 둑에 둔탁한 것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크레모아의 쇠파편들이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거야.. 이건 불꽃놀이야. 꿈속의 불꽃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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