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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자전거 여행길, 제육볶음과 바꾼 시골밥상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아침 해뜨고 저녁 해 지기 직전까지.. 어떤날은 어두워 진 이후까지 자전거를 달리고 나면 온몸이 천근만근이 된다. 피곤한 몸을 누일 텐트를 치는 곳은 마을 어귀의 논이다. 벼베기가 다 끝나 여기저기 볏단이 쌓여있는 곳.. 논에 자리를 잡은 것은 볏단 때문이었다. 텐트 밑으로 볏단을 두껍게 깔지 않으면 가을밤의 냉기를 이겨낼 수 없었다.  

텐트를 치자마자 하는 것이 저녁준비. 내일 달릴 힘을 내기위해선 꼭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우리들의 저녁은 매일 똑같은 메뉴 '제육볶음' 이었다. 돼지고기 한근에 한 500원쯤 했었을까.. 돼지고기 한근에 고추장 한 숟가락 잘 섞은 다음 그냥 익혀먹던 초간단 제육볶음이었다. 아무런 양념도 야채도 전혀 들어가지 않은 초간단 제육볶음을 그때엔 맛있게 먹었었다. 그러나 만들기 쉽지, 먹고나면 든든하지. 이만한 게 없었다. 근데.. 하루 세끼를 밥과 제육볶움만으로 먹는다는 거, 그것도 아침과 점심엔 식어버린 제육볶음.. 이거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은 다른 게 간절히 먹고 싶을 떄가 있었다. 

공동 펌프장이 밖에 있는 경우가 아니면 밥지을 물을 얻으러 민가에 찾아가야만 했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늘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묻고, '서울서 내려온 학생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반찬 한두가지쯤 기분좋게 얻을 수 있었다. 어느날 저녁, 반찬 몇가지 얻어와서 제육볶음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동네꼬마 하나가 신기한 듯 우릴 계속 들여다 본다. 저놈이다..

'너 이거 먹고싶니?' 꼬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엄마한테 가서 먹어도 되냐고 여쭤보고 와. 그럼 줄께'

유인책이었다. 꼬마는 신이 나서 쪼로록 집안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곧 엄마의 손을 잡고 다시 나온다.

'냄새 정말로 좋네요.. 뭐 만드세요?'
'제육볶음이요..좀 드실래요?' 

'호호..우리애가 그게 그렇게 먹고 싶다는데.. 괜찮으시면 들어오셔서 집에서 같이 드실래요?'
'폐가 안된다면..'


성공이다. 얼마만에 먹어보는 된장찌개며 김치며 반찬들이던가.. 게걸지게 잘먹는 우릴 보니 나눠준 사람 마음도 풍성해지나보다, 그분들 표정도 싱글벙글이다. 고추장에만 버무린 돼지고기지만 꼬마가 잘 먹는다. 하지만 그집 엄마와 아빠는 몇점 먹다가 만다. 고추장만 달랑 버무린 제육볶음이 맛있을 리가 없다.

'양념이 없어서 좀 이상하죠? 저흰 이거 맨날 먹어요. 음하하핫'

드디어 꼬마도 돼지냄새에 질렸는지 젓가락이 뜸해진다. 많이 남았다. 나머지는 내일 아침과 점심때 먹으면 된다. 지금은 하늘이 무너져도 된장찌개와 반찬을 먹어야 한다. 이런 순박하고 착한 꼬마가 어디 쉽게 걸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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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전 저녁에, 그 제육볶음을 오랜만에 시켜 먹었다.
첫입을 먹는 순간 와락하고 옛날의 이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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