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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불놀이 3

눈에 취해 걷다보니 어느덧 매복지점에 도착했다. 남대천 방둑 뒤에 있는 진지들.
그것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국방부 현실세계로 뚝 떨어졌다. 신비롭게 흩날리며 공일병을 추억속에 헤매게 하던 하얀 눈이 갑자기 냉기와 축축한 기운만 주는 그냥 눈으로 바뀐다.
‘아 씨바 왜 눈까지 오고 지랄이야..’


무전기를 멘 공일병은 분대장과 한조가 되고 나머지는 2인 1조로 각 참호에 흩어져야 한다.
‘일단 각자위치에는 갔다가 다시 모이자구’
‘김하사, 눈도 오고 날씨도 꿉꿉한데 오늘은 그냥 위치로 가지’
‘순찰 올지도 모르는데 일단 열두시까지는 기다리자’

아무래도 분대장은 책임자가 되니 아무래도 신경이 좀 더 쓰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말년병장 여섯에 말년하사 하나..결론은 쉽게 난다.
‘좋아 오늘은 직접 가자’

아마 다른 때에는 그래도 일단 각자 진지에 위치했었다가 나중에 모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날은 그냥 바로 분침호로 들어가기로 결정해 버린다. 이거떨이 겁대가리를 상실해도 너무 상실했다.
가자 분침호로..

두툼한 가마니때기를 밀치면 바로 분침호 내부다. 눈 내리고 바람부는 곳에 있다가 그래도 실내라고 들어서니 제법 포근하다. 지푸라기 냄새가 좀 심하게 나는게 흠이라면 흠이다. 일어서면 대가리보다 약간 높게 천정이 있고 여덟명이 나란히 누우면 딱 알맞을 정도의 넓이, 그냥 잠만 자는 곳이다.

그러나 이 분침호, 참 묘한 힘이 있는 곳이다. 평소 사이가 좋을리 없는 병사들끼리도 이곳에선 아주 친밀해진다. 옆사람의 체온이 있어야만 버틸 수 있는 혹한기의 겨울밤, 옆사람의 체온은 생명의 온기다.
서로들 최대한 딱 붙어서 잔다. 친밀함의 극치다.
그런 곳이 분침호다.


‘어이 공일병, 펼쳐바라’
후라쉬 서너개가 천장에 매달리고 이 군장 저 군장속에 흩어졌던 것들이 가운데에 모인다. 소주댓병 하나, 군용라면 서너개, 군용쏘세지 두어개, 민간 비스켓 서너가지..

어떤 넘은 라면을 먹기 좋을 크기로 부수고, 어떤넘은 총검으로 쏘세지를 자르고, 어떤놈은 반합뚜껑을 훅훅 불면서 먼지를 턴다.

이곳이 군대만 아니면, 그리고 이거떨이 군바리 고참들만 아니면.. 참 그럴듯한 좋은 분위기다.
밖에 눈 내리지, 바람 피할 자그마한 공간 있지, 천정에 조명 끝내주지,술 있지 안주 있지..

소주댓병을 찰랑찰랑 반합뚜껑에 따른다. 그 와중에서도 모든건 고참순이다. 사려깊은 왕고참이 그래도 분대장을 챙겨준다. ‘김하사부터 하지’ ‘강병장부터 해’

일곱명을 지나 드디어 공일병에게도 반합뚜껑이 왔다. 소주가 몇도에 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음보다 더 차가운 소주맛이 정말 일품이다. ‘너도 담배 여기서 피워라’ 다시 왕고참이 공일병을 배려해서 특별히 쫄따구의 실내 흡연을 허락해 준다. 반합뚜껑 돌아오는 횟수는 고참이나 쫄다구나 같다. 낼모레 제대할 말년들이라 그런지 전혀 군대같지 않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우리 이자 낼모레면 민간인인데 다들 형동생 함서 지내뿌자'
'그러면 제가 형이 되는데요'
'니 생일 은젠데?'

대화같지 않은 대화들이 이어지다 다시 공일병에게로 주제가 모인다.
'니 대학다닐때 가스나 꼬시가 따문거 얘기좀 해바라'
'아주 실감나게 해라'

공일병은 소설을 쓴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름들이 난무하고 세상에 둘도 없었던 카사노바가 된다.
'와 씨바자슥 많이도 따뭇네'

쏘세지와 비스켓이 먼저 없어지고 생라면까지 없어질 즈음 댓병도 비워진다.
‘띠바 벌써 끝이가.. 담에는 사홉들이 하나정도 더 해야긋다..’
‘댓병을 두개하죠’
‘미친자슥 마시고 취할일 있나’

영하 수십도의 바깥을 피해, 영하 몇도의 분침호에서 돌리는 그 차가운 소주와 버석거리는 생라면 부스러기, 그리고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쏘세지는 환상적인 조합이다. 뜨거운 라면국물이 있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눈이 부시는 풍족하고 화려한 파티다.군바리들끼리의 자리지만 비슷한 또래 남자아이들끼리라 또 낼모레면 민간이이 될 기대에 젖은 남자아이들이라 분위기가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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