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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팡생각

집을 옮기려다 아버지를 이해하다

담쟁이 덩굴이 집 전체를 감싸고 있었던 흑석동의 3층 오지벽돌집.. 그 집으로 이사 들어가던 날의 흥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 집이 정말 우리 집?’ 넓은 정원과 한강이 보이는 전망, 식구들 각각 방을 써도 남는 방. 비현실적인 현실에 가족들 모두가 흥분했었습니다. 아마 가장 흥분한 사람은 아버지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집이 아버지가 일생동안 꿈꿔온 Dream House 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단풍나무 두 그루와 진달래 영산홍 개나리가 가득하던 비탈 정원은 아버지와 나의 일요일 일터였었습니다. 곳곳에 오솔길을 만들고, 울타리 따라 넝쿨장미를 심고, 소나무와 마로니에를 심고.. 사진에서 보듯 그냥 내팽겨쳐진 비탈에 불과했던 정원이 조금씩 예쁘게 변해가는 건 가족들의 큰 기쁨이었습니. 그 흑석동 벽돌집에서 꿈 같은 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 그리고 어느날 들이닥친 집달리들과 그들이 남기고 간 무수한 분홍 딱지들. 아버지가 새로 시작한 사업이 실패했던겁.

 

우리는 갈현동의 어느 시끄러운 도로변 작은 건물 2층의 8평짜리 전세로 이사를 갔습니.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었습니. 부모님의 아파트가 다시 생기고, 그리고 내 아파트도 따로 가지게 되기까진 그로부터 십오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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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엘 왔습니다. 구체적 계획도 없이 그저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시작했었던 미국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 돈 때문에 담배와 술을 끊고, 남들은 미국에서 시작하는 골프를 나는 미국에 와서 끊었습니. ‘가장 오랫동안 탔던 차와 가장 오랫동안 살던 아파트기록도 세웠습니. 지독하게 살기도 했지만 운이 좋았습니.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재미삼아 구경했었던 동네에 우리 집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이 집이 정말 우리 집?’ 40여년전 흑석동 집에 처음 이사 들어갈 때와 똑같은 흥분이었습니.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비현실적인 현실’이었습니. 우리들의 Dream House.. 의도했던건지 아니면 우연인지.. 예전의 흑석동집과 참 많이 비슷했습니다. 예전에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나도 주말마다 집에 온갖 정성을 쏟았습니. 그곳에서 꿈 같은 4년이 흘렀습니.

Work hard, Retire young.. 장난처럼 지니고 있던 이 모토를 진짜로 실행하고 싶어졌습니. 그래 은퇴하자. 절약하면서 살면 되지 뭐.. 그래서 작년 10, 덜컥 집을 내놓았습니. 하지만 전문가들의 만류로 은퇴는 미루어졌습니. 집을 다시 거둬들일까 고민하던 찰나에 괜찮은 오퍼가 들어왔습니. 그냥 팔기로 했습니. 

 

갑자기 이사나갈 갈 집을 구하는 게 급해졌습니. 집 때문에 골병 든 몸을 생각해서 이번엔 편안하게 살기로 하고 작은 콘도를 보고 다녔습니. 아.. 예상은 했었지만 작은 콘도에서 살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했던 겁니다. 정신차려.. 니가 언제부터 큰집에서 살았었다고.. 하지만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집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허전함도 대단했습니다. 아 이집이 어떤 집인데.. 이사하기 싫었습니. 그래서 에스크로가 깨지길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었습니. 근데 안 깨졌습니다^^ 그 무렵이었습니. 평생 경험하지 못했었던 이상한 감정이 치고 올라왔습니


불현듯 아버지가 떠오른 것이다


그 넓은 흑석동 집을 떠나 8평 쪽방으로 옮기던 30여년전의 아버지. 당시 아버지의 쓰라렸을 심경이 갑자기 내 가슴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내 의지로 집을 작게 옮기는데도 내 가슴이 이렇게 휑하고 썰렁한데, 차압으로 쫓겨나 쪽방으로 옮기던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가슴이 허물어져 내리며 먹먹해졌습니.

 


지금까지 생각하던 아버지의 노년은 이랬습니다. 육십대 초반이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업을 시작했다가 망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쪽방에서 살게 만들었고, 확실한 직장을 그만두고 일을 벌였던 아버지가 불쌍하기도 했지만 한편 원망스럽기도 했었습니. 아버지는 끝내 재기하지 못했습니. 우리가 늙은 아버지를 부양했었습니. 그리고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부자지간이란 게 원래 다 그렇잖아 데면데면.. 나는 그래도 아버지에게 잘하는 편일걸.. 이랬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놀랍게도 아버지가 겪었을 고통을 단 한번도 진심으로 헤아려보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다 집을 옮기려고 하면서 갑자기 세월속에 묻혀졌었던 아버지의 고통들이 마음으로 느껴기 시작한 겁니다. 놀라웠습니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아버지를 헤아리기 시작한 나라는 놈이 소스라칠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아무리 자식을 키우지 않았기로소니 어떻게 이렇게 아버지의 입장을 하얗게 망각하고 살아왔을까. 세상에 이렇게 철이 없고 이렇게 나쁜 놈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 나이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던 한 가장의 정신적 고통을 진심으로 헤아린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아직 어린 자식 새끼들 때문에 육십초반에 사업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가장의 공포감과 책임감을 진심으로 헤아린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쪽방에서 살게 된 가족들을 보면서 느꼈을 가장의 좌절과 참담한 심경을 진심으로 헤아린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냉정했던 가족들에게 느꼈을 한 가장의 배신감과 외로움을 진심으로 헤아린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랬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는 역할로만 기억했을 뿐, 나와 똑 같은 한 남자였었다는 사실을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겁니다. 말로만 그리워했을뿐 아버지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단 한번도 없었던 겁니다. 아니 그리워했다는 것도 거짓이었습니다. 살아생전 따뜻하게 못해드린 죄책감을 그리움으로 포장하고 회피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버지에게 너무 죄송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이후 한동안.. 마음이 몹시 불편하고 우울했었습니. ‘늙은 아버지를 살갑게 대해 드리지 못한 것이 그 동안의 한이었었는데, 거기에 더해 아버지의 고통을 한번도 헤아리지 못했던 죄책감이 더 생겼기 때문입니다. 시간만 나면 마치 기도를 하듯 기타를 잡고 대니보이를 켜며 아버지께 사죄를 했습니다.



얼마 후.. 다행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 편해졌습니. 아버지께 죄송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무정했던 아들 놈이 늦게나마 '마음으로' 당신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에 대해 아버지가 천만 다행으로 여기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또 나 역시 아버지를 난생 처음마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와 난생 처음으로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그랬습니다. 무정한 아들놈의 이 늦은 깨달음은 아버지도 좋고 아들도 좋은 거였습니다

 

아버지 잘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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