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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팡생각

'적극적'이란 건 칭찬이 아닐 수도 있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옛 성현의 말씀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살아가면서 점점 그 의미가 심장하게 받아들여지는 말은 바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不及)과 매한가지다()라는 말씀. 이 말씀의 상황은 이렇다. 공자의 제자인 자사가 공자에게 다른 제자 두명을 평가해달라고 물었더니 공자왈 한놈은 좀 지나치고() 한놈은 좀 모자란다(不及)’라고 하셨단다. 그래서 도대체 어느쪽이 낫다는 말씀이십니까?’ 재차 물었더니 지나친 것과 모자란 것이 매한가지다(과유불급)’라고 하셨다는 거다. 요즈음 흔히 지나친 것은 차라리 모자란 것만 못하다라고 쓰여지기도 하는 그 과유불급이다.

 

즉 공자님의 대답은 치우침이 없는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게 바로 자사가 지었다고 여겨지는 중용의 핵심이다. 스승 공자의 말씀을 표절하여 다른 제목으로 엮어낸 중용^^.. 간단명료하게 정리하자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 인간적 욕망과 도덕적 본성을 중간쯤- 어디에서 만나게 하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이렇게 욕망과 도덕을 끌어내리고 끌어올리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인생과 사회에 대한 매우 진지하고 깊은 성찰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과도한 경쟁에 내몰린 현대인, 특히 철 지난 이념논란에까지 함몰된 한국인들이 이 중용을 실천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현대상황과 맞지 않는 것도 있다. 분명 중용에는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유식하고 현명한 자들은 지나치고, 무식하고 우매한 자들이 모자란다)라고 했건만 현대 한국사회는 이렇지 않다. 무식하고 우매한 자들이 훨씬 더 설친다.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논리적 좌파보다는 논리라곤 '빨갱이타령'밖에 없는 감성적 우파가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사회에서 중용의 도를 실천하며 중도로 존재하기는 어렵다. 글로벌 스탠다드로는 보수주의자’, 한국형으로는 중도우파였던 내가 어느 순간 수구꼴통들로부터 좌빨새끼로 몰려버린 게 그 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 과정에서 실제로도 내가 중도좌파로 스탠스가 옮겨져 있음을 느낀다는 점이다. 중용을 허락치 않는 사회,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다. ..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말하려던 원래 얘기로 돌아 간다.^^

  

중용을 현대의 언어로 하면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일 것이다. 너무 나서지도 너무 물러서지도 않는 사고와 언행.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러군데에서 그 경계가 많이 애매하다는 걸 느낀다. 그 중의 하나가 사회생활에서의 적극성이다


적극적인사람과 너무 설쳐 민폐끼치는사람을 구분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적극성이란 개념 자체가 한쪽으로 치우친 개념이니(積極..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당연히 중용과 부딪힐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에티켓.. 프랑스어 'Estiquier'에서 나온 거라는데 원래 나무 말뚝에 붙인 출입금지란 뜻이라고 한다. 베르사이유 정원을 보호하기 위해 화원 주변에 써붙였던 것즉 에티켓의 어원은 가까이 오지 말라. 상대에 대한 일정부분의 거리 유지, 상대에 대한 객체로서의 존중과 배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하는 언행.. 즉 에티켓은 곧 중용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적극성은 이 에티켓과도 상충된다. 따라서 모든 에티켓을 충족시키면서(중용의 도를 지키면서) 적극적이긴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적극적이라고 생각해서 행동하지만 타인들은 그걸 무례라고 보는 거다. 쟤 왜 저렇게 설쳐? 재수없게’..

 

그래서 적극적인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역효과를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적극적이다. 왜 그럴까? ‘적극적일 수 밖에없는 상황 때문이다. 사람들이 날 멀리하기 때문에 그들에 다가서려고 더 적극적일 수 밖에 없는..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인정받으려 더 적극적일 수 밖에 없는.. 이런 악순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관계에서 적극성과 에티켓(접근금지)의 중간지점은 도대체 어떻게 찾아야 할까? 어떻게 적극적이면서도 중용의 도를 지킬 수 있을까?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이게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거 쉽지 않다. 이해관계가 얽혀있다면 더더욱 불가능하다. 하지만 노력해야 한다. 역지사지야말로 적극성과 무례함의 경계를 아우르는 유일한 처세이기 때문이다. 행동이나 말을 하기 전에 상대방 입장을 헤아려 보는 것.. 노력과 훈련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설사 돈이 걸려 있는 문제라도, 이혼이 걸려있는 문제라도, 양방이 역지사지를 할 수 있다면 소송까지 가지 않더라도 접점이 찾아진다.

 

하지만 역지사지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경우도 있다. 에티켓이나 예의나 매너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는 경우다. 친구 머리통을 때리는 걸 친근함의 표시로 여기고 있으면서 자기도 친구로부터 머리통 맞는 것도 즐긴다면, 이 사람에게 역지사지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적극적이지만 무례한 자기의 행동을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도 단지 적극적인행동으로 인식한다면 도리가 없다. 내가 배우자를 좋아해주니 배우자도 날 당연히 좋아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도리가 없다. 평생 적극적이지만 '사람들이 귀찮아 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적극성도 있다. 이십여년전 한 친구로부터 전화.. ‘친구 A가 곧 너한테 전화 할거다. 하도 알려달래서 어쩔 수 없이 네 번호 알려줬다. 정수기를 팔아 달라고 할거다. 거절해라. 걔 지금 망해서 물 불 안 가린다. 마음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 거절해라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작은 사업을 하다가 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정수기 영업을 하는 거란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문제였다. 닥치는대로 동창들을 찾아가서 자기의 어려운 처지를 말하고 정수기를 팔아달라고 한다는 거다. 도대체 무슨 정수기인지 가격이 150만원이나 한단다. 벼랑끝에 몰려 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던 A는 역지사지할 겨를조차 없었다. 물불 안가리고 적극적으로 영업을 하던 그 친구는 결국 영업도 실패하고 친구도 모두 잃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고 한다.

 

 

남들로부터 적극적이란 평가를 받는 분들.. 


이거 칭찬만이 아니다. 그 말엔 조소도 듬뿍 담겨있다. 적극성은 성공하기 위해 분명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무서운 양날의 칼이다. 잘 못하면 자신이 베여 사람을 잃는다. ‘과유불급’을 알고 역지사지해서 중용을 잘 찾아야 한다. 나이 들수록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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