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보는 어떤 아저씨가 우리집에 왔다. 머리가 거의 백발인 중년 남자.. 예의바르게 ‘처음 뵙겠습니다’ 해야 하는데 ‘야 이 새끼.. 정-말 오랜만이네’ 했다. 사실은 '처음 보는 아저씨'가 아니라 '35년 만에 만나는 중학교 동창'이기 때문이다.
두달여 전 날아온 정체불명의 이메일 한통.. ‘그 옛날에 친구’ 라는 제목이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주소였기 때문에 바로 스팸함으로 이동시켰다. 근데 ‘그 옛날에’ 라는 '맞춤법 틀린' 제목이 마음에 걸렸다. 스팸메일이 아니라 진짜로 날 찾는 옛날 친구의 메일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한글 맞춤법을 틀릴 정도라면 아주 오래 전에 한국을 떠났다는 얘기.. 그렇다면 혹시? 큰맘 먹고 스팸함에 있던 그 메일을 열어봤다. 예감이 맞았다. 35년전 헤어졌었던 친구였다.
중학교 2학년 때 가장 친한 친구였다가, 중3 초에 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연락이 완전히 끊겼던 친구. 전혀 소식을 모르고 지냈었기 때문에 그립긴 하지만 어느덧 기억의 한켠으로 밀려나 아주 희미하게만 남아있었던 친구. 씨애틀에 산다는 그 친구가 날 보겠다고 일부러 LA에 오겠단다.
사실 걱정도 많이 되었었다. 그와 나 사이엔 너무나도 긴 세월이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단짝 친구였던 건 분명하지만 당시는 아직 가치관이 정립되기 이전이었던 코흘리개 중2.. 그가 어떤 성격의 아이였는지조차 희미했다. 그와 만나는 스케줄이 잡힌 이후,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려 노력했지만 떠오르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 ‘제목은 기억나는데 줄거리는 잘 기억나지 않는 영화’ 같았다. 그의 얼굴과 독특했던 그의 목소리 그리고 한두가지 에피소드가 겨우 기억이 났다.
전화통화도 없이 Line으로 텍스트만 주고받다가 '직접' 만나기부터 했다. 완충이 전혀 없었던 거다.^^ 다행히 어색하진 않았지만 상당히 생소했다. 얼굴을 아무리 뜯어봐도 예전의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십 넘은 남자의 얼굴에서 열몇살 소년의 모습을 찾는다는 건 쉽지 않았다. 목소리에도 전혀 예전의 흔적이 없었다. 즉 그는 생판 처음 보는 아저씨였다.^^ 기억하는 추억도 별로 없고, 한국과 미국에서 따로 성장하고 살아왔으니 공감할 만한 젊은 시절의 주제도 없고, 종교가 뭔지 정치적 성향이 어떤지도 모르고. 한마디로 난생 처음 보는 미지의 아저씨와 앞으로 1박2일을 같이 보내야 하는 거였다. 솔직히 부담이었다.^^
예상했던대로ㅎㅎ 옛날 이야기는 곧 밑천이 드러나고 말았다. 기억하고 있는 게 둘 다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같이 기억하는 다른 친구의 이름도 없었다. 대학시절이나 젊은 시절의 이야기도 서로 너무 달랐다. 종교나 정치 같은 민감한 주제들도 피해야 했다. 결국 ‘지금 사는 얘기’밖에 할 게 없었다. 오래된 친구와의 대화는 ‘옛날 추억 뜯어먹기’가 9할인데 그게 안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나저나 나 어떻게 찾은거냐?’
작년에 Youtube에 올렸던 기타 두엣 동영상이었단다. 그 제목이
그와 함께 했던 1박2일이 지나고 그는 다시 씨애틀로 돌아갔다. 다음엔 씨애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약간은 어색하고 약간은 불편했던^^ 이틀을 보내면서 다행히 '낯선 아저씨'에선 벗어났다. 편하게 말을 하고 가끔 욕도 하는 사이가 됐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온전히 '친구'라는 느낌은 얻지 못한 것 같다. 아마 이건 그도 마찬가지일 것. 완전히 다른 곳에서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왔던 35년의 세월이 어디 그리 만만할텐가. 같이 지내는 시간이 조금은 더 필요할 터.
하지만.. 정말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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