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로 가는 아버지의 만년필

만년필의 그 묘한 필기감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부드럽기 보다는 약간 사각거리는.. 원래의 자기 글씨체보다 조금 더 멋지게 글씨를 뽑아주는 만년필의 그 필기감. 아버지의 멋진 필체도 생각났다. 그래서 아버지의 만년필을 그대로 보관만 하기 보다는 그것으로 내가 아버지 필체를 흉내내며 글씨를 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년필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잉크에 아교질이 섞여 있어서 오랫동안 두면 엉겨 붙는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오래 사용하지 않았던 만년필은 물에 충분히 불려서 엉겨 붙은 잉크찌꺼기들을 녹인 후 굉장히 조심스럽게 만져야 한다는 걸 전혀 몰랐다.

 

그래 이딴거 몰랐을 수 있다. 이거 아는 사람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무려 31년간 사용하지 않았던 만년필이었다. 최소한의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만년필은 함부로 만질게 아니라는 정도는 알았어야 했다. 최소한 인터넷 검색부터 해봤어야 했다. 하지만 무식해서 너무 용감했다. 굳어서 돌아가지 않는 걸 무리하게 돌렸다. 돌아가긴 했으되 그 이후 만년필에 잉크가 안 들어간다. 

 

그제서야 만년필의 구조를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냈다. 참 빨리도 생각해 냈다. 인터넷을 뒤졌다. 끝부분을 돌리면 피스톤이 잉크를 빨아들이는데 그 피스톤이 왜 움직이게 되는 걸까? 진공상태에서 음압으로 움직이는 건가?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며칠 후 드디어 오래된 몽블랑 만년필을 분해해 놓은 사진을 하나 발견했다. 분해 사진을 보니 윗 부분 잉크 주입 knob에 무슨 screw 같은 게 붙어있다. 저래야 뭔가를 밀었다 당겼다 하지.. 근데 아버지의 만년필엔 screw가 안 보인다.

일요일 저녁, 고된 노가다일을 끝내고, 저녁 먹고 샤워를 마치자마자 만년필과 씨름을 시작했다. 만년필을 물에 충분히 불린 후 조심스럽게 분해를 해봤다. 잉크찌꺼기와 물을 빼내느라 아랫쪽으로 힘줘서 뿌렸더니 뭔가가 빠져나온다. 찾고 있던 그 screw다. 이게 왜 여기서?

원래 knob과 screw가 분리되어 있는 건가? 하지만 돋보기로 들여다 보니 그건 부러진 거였다. 안 돌아가는 knob을 무리하게 돌리던 중. 

 

초강력 순간 접착제를 생각했다. 하지만 상식 수준에서 생각해봐도 아무리 초강력 순간접착제로 붙인다 한들 돌릴때마다 ‘비틀어져’ 가해져 오는 힘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시도는 해보기로 했다. 원래 재질보다도 더 강하게 붙어버리는 초강력 순간접착제 아니든가.. 하지만 이 조그만 녀석은 붙질 않았다. 재질이 도대체 뭔지 접착제 성분만 따로 놀다 떨어져 버린다. 일단 포기했다.

 

만년필을 물에 불렸더니 아랫부분도 분해가 된다. 잉크를 담는 통 부분이 나온다. 잉크를 수동으로 넣음 되지 뭐.. 그래서 주사기를 이용해서 잉크를 넣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만년필을 제대로 잡고 써봤다. 아련하게 잊고 살았던 만년필의 필기감이 느껴진다. 그래 이런 거였지.. 국민교육헌장.

 

오랜만에 또박또박 글씨를 썼더니 손 아구가 아파온다. 좀 쉬었다 하기로 했다. 근데 만년필을 쥔 오른손 손가락에 잉크가 묻어있다. 잉크를 넣으면서 그 손잡이 부분에 묻어 있었나? 하지만 아무리 닦아도 잉크가 계속 묻어 나온다. 돋보기로 들여다보니 플라스틱에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이거 역시 첫날 무리하게 돌려봤었던 게 원인이었다. 잉크 넣는 피스톤 knob 부러지고, 잉크 넣는 통 깨지고.. 

시간은 이미 열한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그만 자고 내일 하자. 근데 잠이 안 온다. 속이 상해서다. 후회가 끝없이 꼬릴 문다. 그냥 어머니가 보관하시게 할걸 괜한 욕심 부리다가.. 만지기 전에 한번이라도 인터넷 검색을 할걸.. 아니 단 십초라도 생각이란 걸 좀 할 걸.. 후회들이 점점 죄책감으로 번진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다음날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몽블랑 서비스센터로 보내면 수리가 아니라 거의 무조건 교체란다. 교체비용이 만년필 가격과 맞먹는단다. 다행히 한국에서 유명한 만년필 전문가를 알게되어 그분에게 먼저 문의했다. 대답이 왔다. 부품이 있어야만 한단다. 결국 미국 텍사스에 있는 몽블랑 서비스센터로 보내야만 할 것 같다.

 

몽블랑에 문의하니 무조건 물건을 먼저 보내란다. 자기들이 보고나서 판단을 해주겠단다. 부품이 있는지, 고칠 수 있는지.. 만약 거기서 안되면 독일 본사로 보낸단다. 거기에도 만약 부품이 없으면.. 원할 경우 금형을 새로 짜서 부품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단다. 말은 쉽다. 하지만 만약 여기까지 가면 비용이 엄청날 거다. 작은 박스에 정성스럽게 포장을 했다. 텍사스로 들고 갈 수가 없으니 소포로 보내야 한다. 보험을 아무리 들면 뭐하나.. 잃어버리면 이 물건을 찾아주는 게 아닌데.. 하지만 방법은 이것 뿐이다. 아버지의 만년필이 내일 드디어 텍사스로 간다.

 

괜한 욕심과 '놀라운' 무지함이 일을 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