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영어시간엔 ‘펜맨쉽’이라는 게 있었다. 공책에 영어 알파벳이 그려져 있고, 옆에다 그 모양을 흉내내 ‘펜’으로 글씨를 쓰는 것. 반드시 잉크를 찍어서 쓰는 '전통의 펜'으로 써야만 했었다. 펜으로 글씨 연습을 해야 글씨체가 예뻐지기 때문이란다. 국민학교 내내동안엔 '연필'로 글씨를 써야 글씨체가 좋아진다고 하더니만.. 영어는 다른가보다 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재밌는 걸 발견했다. 희한하게 가족끼리 글씨체가 닮아있더라는 것. 나이가 들면서 내 필체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필체 중간쯤 되는 걸 보곤 깜짝 놀라고, 악필인 누구누구의 가족들의 필체를 봤더니 희한하게도 그들의 필체가 똑 같은 모양의 똑같은 악필인 걸 확인하곤 박장대소.. 과학적 근거는 없겠지만 ‘필체도 유전이다’ 라고 확신한다ㅎㅎ)
번거로웠다. 대여섯자 쓰고 다시 잉크를 묻혀야 하는 것도 귀찮았고, 잉크때문에 툭하면 손과 입술이 검푸르게 물들고, 또 어쩌다 책과 가방이 온통 잉크로 범벅이 되는 것도 번거로웠다. (당시 학생들의 가방엔 김치국물자욱 만큼이나 잉크자욱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깔끔한 만년필이 갖고 싶었다. 아침에 잉크를 한번 넣으면 하루종일 빵빵하게 잘 나오는 그런 만년필. 근데 아마 당시 영어 선생님은 만년필을 못 쓰게 했었던 것 같다. 만년필도 끝에 펜이 달려있는데 무슨 차이 쒸.. 어쨌든 내가 처음으로 만년필을 가지게 된 건 더 이상 펜맨쉽을 하지 않는 2학년쯤 무렵이었던 것 같다.
당시 학생들에게 인기였던 '빠이롯뜨'는 아니었을 거다. '파카'는 더더욱 아니고. 학생용 빠이롯뜨와 비슷한 가격이지만 모양은 훨씬 더 번쩍 폼나는 그런 만년필이었던 것 같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화려했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정체불명의 아저씨들이 007 가방에 만년필들을 쫙 펼쳐놓고 팔던 그런데서 샀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던 무렵 우연히 아버지가 젊었을때부터 쓰셨다는 만년필을 본 적이 있다. 아버진 그게 만년필 중에서 최고로 좋은 ‘몽블랑’이라고 하셨었다. 파카가 최고 만년필이라고 알고 있던 내게 들어본 적도 없는 몽블랑이 최고라고 자랑하는 아버지의 설명은 잘 들리지 않았다. 직접 써봤었지만 내 싸구려 만년필과 별 차이도 없었다. 아무튼 그 기회에 ‘나도 좋은 만년필 하나 사주시오!’ 해서 중학교 졸업 선물로 좀 좋은 빠이롯뜨 만년필을 하나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ㅎㅎ
빠이롯뜨였든 아니면 007 가방에서 산 만년필이었든.. 아무튼 한동안은 만년필을 꽤 애지중지 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플러스펜 같은 게 나오면서 만년필을 안 쓰기 시작했고, 이후론 만년필이란 걸 아예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 만년필도 아버지의 만년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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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내 나이의 어떤 남자가 나와 자기의 소중한 물건들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근데 그가 보여주는 물건 중 내 가슴을 덜컥하게 하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쓰시던 거라며 그가 한 만년필을 보여준 거다.
그 만년필을 보고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었다. 이상했다. 이 느낌 뭐지? 까맣게 잊고 지냈던 만년필이라는 애틋한 물건 때문이었을까? 그렇다고 가슴이 먹먹해지기까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걸 보고 나도 만년필을 하나 가져야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바로 만년필을 고르기 시작했었다. 만년필 중 최고는 몽블랑이지..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다. 일렉기타를 사느냐 만년필을 사느냐.. 따위로 고민을 좀 했다. 그러면서도 전혀 몰랐었다.
남의 만년필을 보고 가슴이 먹먹해졌었던 이유를 알게 된건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서였다. 어느날 문득, 그야말로 문득.. ‘내 아버지의 만년필’을 기억해냈던 것이다. 어떤 이가 ‘우리 아버지가 예전에 쓰시던 만년필이예요’ 하는 걸 들으면서도, 만년필을 고르며 '만년필은 몽블랑이 최고'라고 하면서도 정작 '내 아버지의 만년필'을 떠올리지 못했던 내가 너무 한심했다. 이런 무심한 놈, 천하의 불효막심한 놈..
마음이 급해졌다. 다음날 한국 아침 시간을 맞춰 기다렸다가 바로 어머니에게 전활했다.
‘아버지 물건 뭐뭐 남아 있죠?’
‘벼루하고 붓하고 그리고 붓글씨들하고..‘
‘아버지 만년필은요?’
‘아.. 맞다. 늬 아버지 만년필 있었지. 지금 찾아 보까?... 얘 근데 그게 없다.’
‘어딘가 분명히 잘 뒀을거예요. 여기저기 함 찾아보세요. 내일 전화 다시 하께요’
‘그래 그걸 버렸을리가 없어. 어딘가 잘 둔다고 뒀는데 내가 그걸 기억 못하는 걸꺼야’
다음날 전화.. ‘얘 그거 찾았어’ 하시는 엄마의 밝은 음성과 웃음소리에 가슴이 턱 풀어졌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물건이, 아들이 지닐 수 있는 아버지의 물건이 다행히 남아 있었다. 소포로 부치시라고 할까
하다가 기다리기로 했다. 만에 하나 중간에 분실되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만년필을 받아들고 그걸 바라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왈콱 나온 것이다. 친구 앞에서 또 사람 많은 식당에서 이게 웬 주책.. 황급히 선글래스를 썼다. 냉면이 나오길래 아무일 없는 듯 냉면을 먹기 시작했다. 근데 먹히질 않는다. 계속 가슴이 먹먹했기 때문이다. ‘이거 면빨이 너무 질기지 않냐?’ 먹다가 남겼다.
몽블랑 만년필엔 꼭 몽블랑 잉크를 넣어야 한다는 소릴 들었다. 만년필이 오자마자 바로 써보려고 잉크를 미리 사뒀었는데 그 소릴 들은 이상 아무 잉크나 넣기는 싫었다. 그래서 다시 몽블랑 잉크를 주문했고 어제서야 그 잉크가 도착했다. 병 뚜껑이 아예 몽블랑 엠블렘이다.
집에 가서 펼쳤다. 만년필과 잉크.. 근데 이 만년필에 잉크를 어떻게 넣는지를 모르겠다. 대충 짐작은 갔지만 인터넷을 뒤져 방법을 최종 확인했다. 일단 물로 먼저 해보기로 했다. 마개를 살며시 돌려보니 역시 안에 잉크는 없다. 있을 리가 없다. 작은 종지에 물을 담아놓고 펜촉 부분을 물에 담구는 찰나.. 깜짝 놀랐다. 물에 잉크가 번져나온 것이다. 웬 잉크? 펜촉에 말라 붙어있었던 잉크인가? 그러나 헹구어도 헹구어도 계속 나온다. 안에 잉크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분명히 없었는데?
이상했다. 십몇년동안 쓰지 않던 만년필이다. 혹시 마지막으로 잉크를 넣은 사람이..? 마침 근처에 종이가 하나 있다. 시장 볼 목록을 적은 종이다. 만년필로 거기에 줄을 살짝 그어봤다. 아.. 써진다.. 그리고 천천히 글자를 써봤다. 아-버-지- 잘 써진다. 계속 글씨를 썼다. 아버지의 만년필..아버지의 만년필..
‘뭐해? 왜 안돼?’
‘아냐 잘 돼’
아버지와의 만남은 그냥 혼자 하고 싶었다. 아버지라는 글씨를 쓰는 그 모습이 혹시 청승맞아 보일까 싶어 그 종이를 황급히 구겨서 버리고 만년필과 잉크를 정리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사무실에 나오자마자 깨끗한 종이를 펼치고 아버지의 만년필로 글자를 쓰려고 한다. ‘아버지의 만년필’이라고 써서 이걸 잘 보관할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넣으셨을지도 모르는 잉크이기 때문이다. 근데..
안 써진다.
물을 묻혀도 안 써진다. 그럼 어제는? 아마 마지막 남아있었던 한두방울이 물에 묻어 어제 쓰여졌었고 그래서 이제 남은 게 없는 것일 게다. 당연히 그럴거다. 하지만 여전히 뭔지 모르겠다. 말도 안되는 생각이, 어제 아버지가 오셨었던 것 같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이 자꾸 머리에 맴도는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속이 상한다. 깨끗한 종이에 정성들여 잘 쓸 걸..
아직 깨끗한 종이에 ‘아버지의 만년필’이란 글씨를 못 쓰고 있다.
아직 아버지의 만년필에 새로 잉크를 넣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에 다시 글을 잇는다.
한국 아침이 되자마자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이 만년필을 마지막으로 쓰신게 대충 언제였던 거 같아요?'
'아버지가 나 쓰라고 줘서 내가 계속 썼었는데.. 흑석동 살 때 쓰고 그 이후엔 한번도 안 썼지'
그럴 리가 없는데.. 몇번을 되묻고 그 당시 상황들을 되짚으며 확인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엄마가 무심코 썼을 수도 있잖아요. 절대 없으시단다. 확실히 안 쓰셨단다. 엄마가 말씀하신 그 이유를 여기서 밝히지 못하지만, 듣고 보니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 만년필이 마지막으로 쓰인 건 1981년도이다. 무려 31년 전인 것이다.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에도 엄마가 이 만년필을 한 두번 썼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걸 확인하려고 엄마께 전화 했던건데, 오히려 더 세월이 흘렀다. 1981년도에 마지막으로 썼던 아버지의 만년필이, 31년이 흐른 2012년도에 아들에게 전해지고 나서.. 아주 잠깐 동안 글씨가 써졌다. 과학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련다.^^
그 날 저녁..
집에 가자마자 쓰레기통을 뒤져서 어제 쓰다가 버린 쪽지를 찾아냈다. 소장하긴 어려울 것 같다. 하필이면 젖은 음식물들과 같이 버려져서.. 그냥 사진으로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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