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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보안대 천사 이등병과 냉커피

군기교육대에 가면.. 아 이거 '영창'이 아니다. 예전 어떤 글에서 군기교육대를 언급했더니 어떤 분이 그걸 영창으로 알고 내가 군대에서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 것으로 오해를 하셨었다. 정확히 말씀드린다. 군기교육대는 범죄자가 가는 '감옥'이 아니라 그저 또라이 짓 좀 한 놈들이 '뺑뺑이' 돌러 가는 곳이다. 그래서 입소자는 최소 상병 대부분은 병장들이다. ^^


아무튼 이 군기교육대에 가면 하루종일 얼차려를 받는다. ‘일과시간 동안이 아니라 하루 종일이다. 새벽 5에 기상해서 밤 열한시에 취침하는데 중간에 불침번이 두시간이다. 즉 하루에 네시간 잔다. 일과시간 동안엔 밖에서 얼차려를 받는데, 얼차려 중간의 모든 이동은 2 1조로 목봉(8인용)을 메고 오리걸음으로 한다. 밥먹으러 갈때에도 이렇게 간다. 

(이걸 둘이서 메고 오리걸음으로 다녔었다)

 

일과시간 이후엔 내무반에서 얼차려를 받는데 비현실적인 암기과제를 주고 그걸 못 외우면 얼차려다열시부터 열한시까진 반성문을 쓰고 마지막에 그 반성문을 크게 낭독하고 군인의 길과 군기교육대 수칙을 복창하고 잠자리에 든다그렇다그곳은 지옥이다^^


그 지옥 같은 곳에 한줄기 빛이 있었으니.. 바로 '작업차출'이었다. 얼차려를 벗어나 하루종일 노가다 작업만 하면 된다. 그 중에 백미는 군기교육대 바로 위에 있었던 보안대의 작업 차출이었다. 다른 곳의 작업 차출과는 달리 그곳의 일은 그리 힘들지도 않았다. 잡초 뽑고 화단 가꾸고 배수로 정리하고 쓰레기 버리고 내무반 물청소하고.. 그곳은 천국이었다. 자그마한 사무실과 내무반이 딸려있던 보안대.. 보안사 직속상관 외엔 그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곳, 그곳 이등병이 서슬퍼런 위병소를 휘파람 불며 지나가도 위병들이 못본 체 하는 곳. 그곳으로 내가 차출됐다. 날아갈 듯 했다.

 

난 당시 제대를 3주 앞둔 병장이었는데, 나(군기교육대에서 차출한 머슴)를 관리하는 보안대 담당자는 이등병이었다. 얼굴 하얀 이등병이 나긋나긋 묻는다. ‘군대생활 얼마나 했습니까?’ (군기교육대 입소 즉시 계급장과 이름표를 떼기 때문에 관등성명을 알 수가 없다) 얼굴 시커먼 말년 병장이 훈련병처럼 대답한다. ‘제대 3주 남았습니다그가 빙긋 웃는다. ‘그래요? 고생 많으시네요’ 


오전 작업 후 그를 따라 '정상 걸음'으로 걸어가서 점심을 먹고 왔다. 밥을 먹자마자 무거운 목봉 메고 오리걸음 하는게 정말 고역이었는데 그 날은 살랑살랑 걸어왔다. 그리고 보안대로 돌아와서 감격의 순간과 마주했다. 그 이등병이 내게 냉커피를 타 준거다. 얼음도 떠 있었다. 군기교육대에선 물도 눈치 봐가면서 마셔야 했는데 이곳에선 앉아 쉬면서 냉커피를 마신다. 자대에서도 냉커피는 마셔본 적이 없다. 그런 냉커피를 군기교육 와서..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되지 않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그는 천사였다. 그곳은 천국이었다. 냉커피는 천국의 음료였다.

오후 일과시간이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밖으로 나가 일을 시작했다. 내가 일을 열심히 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날 또 부르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너무 빨리 해서도 안된다. 일거리가 남아야 내일 또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일을 꼼꼼하게 천천히 하게 된다. 한번 일을 시작하면 웬만해선 허리를 펴지 않는다. 그러면서 신경은 항상 내무반쪽을 향해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걸 그 이등병께서봐주시길 기대하면서. ^^ 일과가 끝나면 그 이등병이 작업을 점검하는데 그 시간이 운명의 시간이다.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위탄 지원자보다 더 떨리는 심정일거다. 


내일 또 부를께요천사의 목소리였다. ‘사무실 일도 좀 도와주세요천사의 화음이었다


바깥 잡일도 감지덕지인데 내일은 사무실 일이란다. 다음날은 진짜로 선풍기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일했다. 서류 허드렛 일들.. 그건 '일'이 아니라 내 생애 최고의 '휴가'였다. 이등병이 그날도 냉커피를 타서 준다. '이거 드시고 하세요' 천사가 타서주는 천국의 음료를 또 마셨다


드디어 일과시간이 끝났다. 또 한번 운명의 시간.. ‘내일도 또 불러드렸으면 좋겠는데, 정말 일거리가 없네요. 죄송해서 어떡하죠’ .... 절망적인 통보가 왔다.^^ ‘아닙니다. 이틀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상대가 비록 이등병이지만 최대한 깍듯하게 감사를 전했다. 진심이었다. 그리곤 군기교육대를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이렇겠지? 인생 최악의 고통스러운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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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 집을 나서는데 분위기가 영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익숙한 느낌이기도 했다. 이게 도대체 뭐지


그건 바로 날씨였다. 일상적인 LA의 날씨가 아니었던 거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 아침부터 높은 온도 그리고 온몸으로 느껴지는 습기.. 그랬다. 그건 한국의 초여름 날씨였다. 사막기후 LA 에선 절대로 맛볼 수 없는 한국의 느낌. 그 느낌을 즐기고자 자동차 창문을 열고 달렸다

 

주말에 손님이 오기 때문에 마무리를 해야 할 정원 일이 있어서 일찍 집으로 돌아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쭈그리고 앉아 일을 시작했다. 호미로 흙을 걷어내는 일을 시작하자마자 습기 탓인지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진다. 그때 갑자기 문득 밀려든 추억의 순간.. 


85 6월초의 보안대 주변 잡초 제거작업..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얼굴 하얗던 천사 이등병과 그가 타준 냉커피도 떠오른다.


그도 아마 오십줄에 접어들었을 터..

천사 이등병.. 그때 정말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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