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남쪽으로 출발했던 그 날이 아마 오늘 정도였었을 거다. 여행 중간 대전역에서 후배들을 만난 날이 ‘10월의 마지막 날’이었으니 출발은 그로부터 일주일 전쯤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두시간 타던 자전거를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하루 열시간씩 달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상상해보지 않았었다. 도봉구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었는데 날이 저물도록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래서 구로동 빠근이네 집에서 하루 묵고 다시 길을 가기로 했었는데.. 이틑날 아침엔 엉덩이 통증으로 안장에 올라앉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다리는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고. 몸 상태로 보면 당연히 하루 더 쉬고 가야 할 상황이었지만, 종혁이의 성화로 그냥 출발했었다. 내게는 ‘친구집’이지만 종혁이에겐 ‘친구의 친구집’이니 그 집에서 하루종일 뭉갠다는 게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아무튼 칼로 쑤시는 듯한 엉덩이와 다리 통증 때문에 가다쉬다를 반복하며 저녁때 겨우 도착한 곳이 오산.. 거기서 쌀과 석유를 다 팔아치웠다. 여행중 돈을 쓰지 않겠다며 20일치 식량과 석유를 모두 실어 배낭이 너무 무거웠던 거다. 다리나 엉덩이보다 어깨가 더 많이 아플 지경.
몸이 어느정도 익숙해진 다음부터 우릴 괴롭혔던 건 '가도가도 짧아지지 않는 거리’였다. 자동차로 길을 달리다 ‘대전 40km’ 라는 표지판을 보면 ‘다 왔구나..’였었는데 자전거는 달랐던 거다. 한참을 갔는데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거리’는 여행내내 악몽이었다. (물론 이 악몽은 몇 달 후 ‘배부른 투정’으로 바뀌었다. 군대에서 행군을 하면서..)
아무튼 속도가 느린 자전거를 두고 여행 내내 투덜거리다가 어느 날 저녁 이런 약속을 했었다.
돈 없이 할래니까 너무 힘들어. 삼십년 후에 돈 많이 벌어서 ‘폼나는 오토바이’로 이 코스 똑같이 돌자.. 중간에 맛있는 것도 팍팍 사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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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고, 자전거 여행을 떠올리다가 아무 생각없이 뺄셈을 해본다. 그리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2012-1982=30.. 아득한 훗날이라고 여겼었던 그 삼십년 후가 바로 올해였던 거다.
삼십년 후, 오토바이를 사거나 맛있는 걸 사먹을 순 있을 것 같은데..
몸이 이렇게 이역만리 먼 곳에 있게 될 줄은 몰랐었다.
그리고..
'삼십년 후'가 이렇게 금세 올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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