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메리카

우리집 벌새

이 새를 직접 가까이서 본 것은 불과 얼마전이었습니다. 어느 주말 바깥 일을 하고 있는데 '풍뎅이 날개 짓' 소리 같은 게 들렸습니다. 커다란 풍뎅이나 말벌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계속 주변을 맴돕니다. '내가 혹시 말벌의 공격을 받나?' 화들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말벌이나 풍뎅이보다 약간 큰 뭔가가 빠른 속도로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저게 뭐지?..

새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벌레라고 하기엔 너무 큰 거였습니.. 너무 작고 빨라서 정확한 모습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한동안 보니 '새의 몸뚱이'에 '벌레의 날개짓'을 하고 있는 생명체였습니다. 손가락 두마디 정도의 크기인데, 그 날개 짓이란 것이 새들이 하는 ‘퍼득퍼득’이 아니라 곤충들의 ‘부웅-’ 이었던 겁니다. 저게 혹시 티비에서나 보던 벌새? 그랬습니다. 그 미확인 생명체는 바로 벌새였습니다. 벌새.. 길이 5cm 몸무게 1.6g이면서 1초에 날개짓을 70번 하며 시속 85km정도로 날아다닌답니다. 가끔 이런 모습으로 '조류'의 망신을 시키기도 하는 놈.

그런데 이 놈.. 이상하게 저를 따라 다닌다는 느낌입니다. 앞마당으로 가면 그쪽으로 따라오고 뒷마당으로 가면 그쪽으로 따라옵니다. 아무래도 뭘 달라는 의시표시인듯 했습니다. TV에서 사람들이 벌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걸 본 기억이 났습니다. 아! 밥 달라는 거구나.. 원래 ‘동물들의 먹이활동에 인간이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찌어찌하다가 참새들에게 빵가루를 주게 되었었고 그러면서 새들과의 교류에서 재미를 느끼던 차였었습니다.


(밥먹자~ 하고 부르면, 어디선가 참새들이 쪼르륵 달려옵니다. 까마귀나 비둘기에 비해 워낙 작아서 얘들을'꼬맹이들'이라고 불렀었는데, 벌새가 나타난 이후 우린 얘네들을 '거대새'라고 부릅니다^^)


좋다. 참새만 새냐. 이 진귀한 꼬마 벌새들에게도 먹이를 주자. Hummingbird Feeder 와 먹이를 샀습니다. Feeder의 색깔과 생김새는 꽃을 흉내낸 것 같았습니다. 꽃인줄 알고 오라고. 그리고 먹이.. 근데 박스 안엔 액체(꿀)가 아니라 분말가루가 든 봉지가 대여섯개 들어있었습니다. 뜯어보니 그 옛날 물에 타서 먹던 주스가루였습니다. 꿀 대신에 이런 거 먹여도 되나? 잠시 미안했지만 전문가들이 알아서 만들었을 거라고 얼버무리곤 한봉지를 뜯어 물에 탔습니다. Feeder를 두번정도 채울 양이 됩니다. 먹이통을 꽉 채우면 한달은 갈테니 한박스로 육개월은 버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놈들에게 어떻게 소문을 내나.. 하지만 그건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먹이통을 매달자마자 벌새가 나타났습니다. 신기하게도 엉터리 꽃모양의 Feeder에 정말 앉아 주스를 빨아 먹는겁니다. 거실 유리 바로 앞에 매달아 놓으니 벌새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합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Feeder를 확인하러 나갔습니다. 근데 주스의 높이가 눈에 띄게 낮아져 있었습니다. 아마 바람에 흔들려서 밑으로 흘린 모양입니다. 출근했다가 돌아와 보니 거의 1cm 이상 더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그런가? Feeder를 바람이 좀 덜 부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근데 다음날 양이 또 줄어있었습니다. 햇볕 때문에 증발했나? 그늘 쪽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역시 또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범인은 바람도 아니고 햇볕도 아니었습니다. 동네에 소문이 나서 그런지 처음보다 훨씬 더 많은 벌새들이 오고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줄어드는 폭이 점점 더 커집니다. 


한꺼번에 대여섯마리가 몰려들면 장관입니다. 주스를 빨아먹는 입구가 네개이니 사이좋게 앉아서 먹으면 좋을 것을, 쫓고 쫓기는 싸움이 전투기들의 공중전을 보는 듯합니다. 웬만큼 쫓다 돌아오는 게 아니라 끝도 없이 쫓아갑니다. 싸우느라 두 놈이 날아가면 그새 다른 놈이 먹이를 먹고, 그러다가 또 다른 놈과 싸움이 붙고.. 이들의 박진감 넘치는 공중전을 사진에 담아보려고 했지만 하도 빨라서 사진에 담지는 못했습니다.

지난 일요일, 벌새들의 출현 빈도와 줄어드는 주스의 높이를 확인해 봤습니다. 전부 몇 마리인지는 모르겠지만 2~3분에 한번꼴로 나타나선 10초 정도 주스를 빨아먹고 날아갑니다. 어제 퇴근 후 보니 급기야 Feeder가 텅텅 비어있었습다. 일요일 오후에 새로 채운건데.. 3일 반만에 한통을 깨끗이 비워버린 겁니다. 


이 쪼그만 놈들이 이렇게 많이 먹는 줄 몰랐습니다.
벌새 먹이려면 돈 많이 벌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