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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LA 디즈니홀에 울려퍼진 보리밭 - 2010 숭실오비

LA 숭실 OB가 작년에 이어 Disney Concert Hall에서 정기공연을 했다.


디즈니 홀

난생 처음 가본 디즈니 홀.. 초현대적인 겉모습을 내 아날로그 감성으론 도저히 따라잡질 못하겠다. 그저 알미늄 냄비 찌그려놓은 듯, 너무 튄다는 느낌뿐이었다. 근데 안으로 들어가보니 느낌이 딴판이다. 곳곳에 있는 큰 나무 기둥들 때문인지 마치 웅장한 고택에 들어온 듯 마음이 편해진다. 참 잘 만들었다.

70년대말 세종문화회관에 가본 이후 처음 와본 큰 무대다. 그간 공연장들의 변화를 전혀 모르는 나로선 여긴 공연장이라기 보다는 커다란 ‘조형예술’같다는 느낌이다. 그 정도로 아름답다. 파이프오르간 앞에 치솟은 나무기둥들, 스피커를 둘러싼 데코레이션, 천정을 뒤덮은 둥근 나무들.. 돈 많이 들었겠다. 알아보니 3억불 가까이 들었단다. 공연장 하나 지으며 3천억원이라.. 

티비에서 보던 좌석배치다. 무대 옆에도 객석이 있고, 무대 뒤에도 객석이 있다. 무대를 객석이 동그랗게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생긴 공연장을 표현하는 말이 뭔가 있었는데 그게 뭐였는지 잊어먹었다. 아무튼 티비에서나 보던 그런 공연장이다. 작년 여기서 공연을 했던 분이 ‘뒷통수에서 사람이 보고있는 게 영 어색하다’고 했었었는데 와서보니 그게 무슨 뜻이지 알겠다. 이렇게 바로 뒤 가까이에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었다면 진짜로 노래하는 내내 뒷통수가 간질거렸겠다. 하지만 올해는 그 좌석들은 비어있었다. 관객들끼리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도 재미난 경험일텐데..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공연장이 날개
이벨극장 시절엔 툭하면 이삼십분씩 공연시작을 미루던 분들이^^.. 디즈니홀에 오시더만 정해진 시간에 칼같이 시작한다. 물론 그분들이 그러는 게 아니라 공연장 측에서 그렇게 진행하는 거란다. 공연 중간 아무때나 사람들이 들어오던 이벨극장과는 달리, 여기선 스테이지가 진행되는 동안 출입문이 차단된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만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다. 사진이나 비디오촬영도 엄격히 금지된다. 참 잘하는 짓이다. 적당한 통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큰 편리함을 만끽하게 해주는 법이다.

자리가 앞자리다보니 단원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보인다. 그러고 보니 단원 면면도 훨씬 더 빛난다. 이벨극장 시절엔 그냥 '턱시도 입은 동네 아저씨들'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무대가 바뀌니 '예술가' 테가 확 난다. 옷이 날개라더니 ‘공연장이 날개’다. 지휘자께선 차이가 더 난다. 디즈니홀로 오시더니 '평범한 합창단 지휘자'가 아니라 '카리스마 넘치는 마에스트로 포스'가 강하게 풍기신다. 표정도 훨씬 근엄해지신 것 같고^^..

단원들이나 지휘자뿐만이 아니다.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이벨극장 시절 아무렇게나 입고 오고, 여기저기 애들소리 기침소리, 카메라 플래쉬 터뜨리며 어수선하던 분들이, 여기선 모두 일등 관객들이다. 어린 아이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야구모자 쓴 남자 하나를 빼곤 다들 말끔하게 입고 와서 차분하게 공연을 관람한다. 허긴 나 역시도 이벨극장시절과는 다르게 복장에 신경 좀 썼다. 확실히 공연장이 날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좋은 공연장이 좋은 음악가와 좋은 관객’을 만든다. 

단원들, 지휘자와 우리 관객들.. 이제 다시 이벨극장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다. 서초동 최고급 룸쌀롱에서 예쁜 아가씨들이랑 위스키를 마시면서 2인조 밴드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다가, 한물간 아줌마들이랑 소주 털어 마시면서 싸구려 노래방기계에 대고 노래부르는 신림동 과부촌에 가는 그런 기분이겠다. 미안하다 비유를 이딴 식으로 해서.. 아무튼 관객의 입장에서도 이젠 숭실OB가 다시 이벨극장으로 가는 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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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귀에 익은 노래들만 불러주면 오죽 좋을까.. 그러나 지휘자덜.. '똥고집'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 위주로 레파토리를 짠다. 그래서 대부분 클래식 공연이 재미없고 지루한 건데 지휘자들 고집은 여전하다. 물론 지휘자님 주변의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많이 했을 터.. 그래서 귀에 익은 곡들을 중간중간 양념처럼 한두곡 넣으셨다. 이 정도라도 어딘가..

모르는 노래이지만 한 노래가 끝날때마다 '자발적으로 열성적으로 반사적으로' 큰 박수를 치게 된다. 예의를 갖추느라 쳐주는 것이 아닌, 단원들 힘내라고 쳐주는 박수가 아닌 마음속에서 부터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동의 박수다. 손바닥이 얼얼할 만큼 큰 박수다. 그만큼 그들은 잘했다.


You raise me up
첫 스테이지의 You raise me up.. 공연 일주일 전쯤 티켓을 받으면서 이번 공연에 이 노래를 한다고 얘기 들었다. 그때 이렇게 말했었다. '세계적으로 목소리 예쁘다는 사람은 다들 한번 불렀던 곡이고, 그래서 관객들이 그런 최고 연주에 귀가 익숙해져 있는데, 이걸 과연 숭실OB가 그 기대수준에 맞춰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이 양반들 좀 무리한 거 같다. 좀 위험해 뵌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피아노 바이올린 오보 팀파니와 어우러진 웅장한 남성 코러스.. 이들이 연주해내는 You raise me up 은 시크릿 가든의 연주보다도 훨씬 더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남성코러스로 듣는 You raise me up은 그동안 들어본 그 어떤 버전보다 훌륭했다. 최고였다. 


가고파
스테이지가 바뀌고 드디어 기다리던 ‘가고파’ 전곡..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는 1절과 2절의 가사, 외국에서 타향살이 하는 사람이라면 가사를 읖조리다 금세 눈가가 촉촉해지는 그 노래 가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가..’ 가고파라는 제목만으로도 먹먹해지는 가슴인데 중후한 남성코러스로 그 노랠 듣다보니 갑자기 울컥한다.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아 고향에 가고싶다. 증말.  

무대를 보니 노래를 부르는 단원들의 표정도 비감해 보인다. ‘부르는 사람이 감동하지 못하면 관객이 감동받을 수 없다’ 라는 지휘자 말씀이 아니었더라도, 단원들 모두 떠나온 고향산천을 절절이 그리며 이 노래를 불렀었단다. 허긴 이 노래가 무언가. 가고파 아닌가. 그래서 그들의 감정이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되어 노래를 듣던 우리가 울컥했었던 거였나 보다. 노래가 끝나는 순간 누군가 외친 ‘브라보’ 소리와 함께 공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과 박수소리.. 김동진 선생의 가고파.. 이날 공연의 클라이맥스였다.


오케스트라와의 조화
미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다음 스테이지.. 어떻게 저렇게 남성합창과 미니 오케스트라를 맛깔스럽게 버무렸을까.. 태어날때부터 한몸이었던 듯 오케스트라에에 완벽하게 녹아드는 남성 코러스.. 지휘자의 뛰어난 역량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단원들의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10인조 오케스트라에 팀파니, 그리고 남성합창단.. 얼핏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그 구성은 지휘자의 손끝에서 실로 환상적인 하모니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이런 구성을 숭실오비가 처음 시도한 건지 아니면 전에도 이런 구성을 시도한 합창단이 있었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정말 멋지다. 정말 멋지다.

그리고 무식한 고백 하나.. 팀파니에 음이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그냥 박자 맞춰서 두드리기만 하면 되는 큰북인줄 알고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북에 음정이 있었다.^^ 그동안 팀파니 연주자들을 좀 무시했었었는데.. 미안하다.


기립박수 그리고 보리밭
정규 스테이지가 모두 끝났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관객들의 열렬한 기립박수가 터진 것이다. 이거 숭실 OB공연에서 처음보는 장면이다. 폭발적인 관객들의 반응에 단원들도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관객들의 앙코르 요청에 대해 ‘왔다갔다 하느니 한번에 두곡 하겠습니다’ 하시는 지휘자.. ‘사공의 노래’와 ‘평화의 기도’를 앙코르 곡으로 들었다. 앙코르 곡 두곡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은 그간 합창단과 관객들간의 암묵적 약속이었다. 근데 그날따라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멈출 줄을 모르고 이어진다. 그러자 단원들 역시 내려가지 않고 무대위에 그대로들 있다.

박수소리가 이어져 단원들이 남아있는건지, 단원들이 남아 있어서 박수소리가 이어지는 건지.. 혹시 오늘 한곡 더 준비했나? 하지만 분위기를 보건대 미리 준비된 것 같지는 않다. 뭔가 수상쩍은 분위기였던 것이다. 약간 당황하신 것 같은 지휘자님, 단원들과 반주자와 부산하게 뭔가 상의하시더니.. ‘보리밭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다같이 부르시죠’

그렇게 디즈니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보리밭을 부르기 시작했다. 박수 열심히 치시던 옆 할머니들, 공연내내 어지간히 소곤대던 뒷줄 아줌마들.. 다들 보리밭을 부르기 시작했다. 가고파와는 다른 또 하나의 큰 감동이었다. 앞 열에 앉았던 타인종 아가씨와 2세 젊은이들이 신기한 듯 뒤쪽을 돌아보며 탄성을 지른다. 그래 신기했을 것이다. 관객 전원이 악보도 없이 웬 가곡을 모두 외워 부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바로 우리의 보리밭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나중에 들어보니.. 원래 앙코르 두곡 이후에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어있었는데, 제일 먼저 움직여야 할 앞줄 양쪽 끝 단원들이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더란다. 우뢰같은 박수에 그들이 잠시 착각을 했었던 모양이다. 그 바람에 길이 막혀 모두들 그대로 서있었던 거였고, 그 와중에 관객들의 박수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하지만 더 준비한 곡은 없었고.. 그래서 순간적으로 지휘자와 단원하나가 기지를 발휘해서 보리밭을 제창하기로 했던 거였단다. 

2010년 8월7일 토요일, LA의 디즈니 콘서트홀에선 이렇게 ‘보리밭’이 울려퍼졌고.. 그렇게 관객들과 단원들이 한몸이 되었었다.


끝나지 않는 열정, 카네기홀
오늘 단원과 통화를 했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그냥 디즈니홀로 쭉 갑시다’ 그렇게 앞으로 말뚝 스폰서가 되기로 약속했다. 안 그래도 내년공연 8월6일로 벌써 예약했단다. 그러더니 하는 말.. ‘2013년엔 카네기홀에서..’

이 양반들이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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