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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수행? 깨달음? 3 - 괴로워서 출가했을 뿐

얌체 끼어들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변을 보면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공부 안하고 잠만 자는 내 아이, 무능하면서 성질 더러운 내 남편, 쿵쿵 뛰는 윗층 아이들.. 부패한 공무원들, 부조리로 찌든 사회, 쳐지는 국민의식, 탐욕스런 기자들, 타락한 종교인들, 표현할 말이 없는 국회의원들..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괴로움은 동물들과 사람들이 같을까요? 

1. 본능에 따라서만 움직이면 되는 동물들은 사는데 필요한 괴로움만 있습니다. 배고픔과 강자에 대한 두려움, 이 두가지만 괴롭습니다.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이면서 먹고 죽이고 먹히면 됩니다. 그러나 도덕이니 법이니, 종교니 철학이니, 정의니 진리니.. 어려운 말을 동원하는 인간들은 좀 다릅니다.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고 참아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누굴 죽여야 할 때에도 참아야 하고, 뭘 빼앗거나 훔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하고, 자고 싶어도 일어나야 하고, 일어나고 싶어도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본능을 억제하려니 괴롭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 약육강식의 법칙이 정직하게 지켜지는 동물의 왕국에선 괴로움이 없습니다. 동물들은 지 꼬라지를 잘 압니다. 소크라테스가 어렵게 설명해 주지 않아도 동물들은 모두 저 자신을 압니다. 자연스럽게 강자가 약자들을 지배하고 약자들은 강자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인간사에선 동물세계와 달리 약한 놈이 강자를 지배하기도 합니다. 두가지입니다. 음모와 모략으로 강자의 뒤통수를 쳐서 그 힘을 빼앗거나, 돈많은 부모를 만나 그 돈을 이어받고는 그걸 제 돈인양 쓰는 겁니다. 그런 더러운 일들을 보니 인간들은 괴롭습니다.


(잡아먹히는 얼룩말이 '왜 하필 날..'이러면서 원망하지 않습니다. 잡아먹는 사자도 살점을 뜯어먹으면서 '얼룩말이 아프겠군, 좀 미안한데..' 이러지 않습니다.)  

3. 동물들은 자책이나 부끄러움의 괴로움이 없습니다. 배가 고파 누굴 죽여 살을 뜯어먹어도 죄책감이 없고, 남이 사냥한 걸 윽박질러 빼앗아와도 죄책감이 없고, 암놈 하나를 위해 피튀기며 싸워도 부끄럽지 않고, 싸우다 져서 도망가도 부끄럽지 않고, 다들 보는 앞에서 섹스를 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미안함, 부끄러움, 죄책감을 너무 많이 지니고 삽니다. 본능을 다스리라고 가르치는 도덕과 종교의 덕입니다. 꿈틀대는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경멸하니 그것 때문에 더 괴롭습니다. 괴로움을 없애주어야 할 종교가 괴로움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무능해서 직장에서 짤렸는데 일할 생각은 안하고 집에서 뒹굴거리고, 할 수없이 내가 식당 주방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겨우 끼니를 때우는데 아직 시댁식구들은 눈치도 없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습니다. 꼬장꼬장 잔소리하던 시어머니 좀 잠잠하다 싶더니 치매끼가 슬슬 보입니다. 놀고 있는 남편은 집안일엔 손도 안대고 성질마저 더럽고, 주제에 바람 피울 궁리를 하지만 막상 밤일은 토깽이입니다. 게다가 새끼들마저 지 애비를 닮았는지 공부는 드럽게 못하고 툭하면 사고치고 들어와서 뒤치닥거리를 하게 만듭니다. 상황을 바꿔보려고 지난 십년을 고생했지만 좋아지기는커녕 갈수록 나빠집니다. 하루하루가 죽음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어떤 스님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분 말씀대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해봤습니다. 먼저 이 괴로움의 근원을 찾아봤습니다. 한가한 스님들은 괴로움은 다 내 마음때문이라고 하는데 수긍이 가질 않습니다. 이 괴로움이 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런겁니까? 좋습니다. 모든 게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니 마음을 비우려고 해봤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안됩니다. 해봐야 안되는 걸 붙들고 있으니 짜증과 괴로움 하나만 '더' 붙었습니다.

그래도 또 비우려고 하고, 내려 놓으려고 하고, 참으려고 해볼까요?
하지 마세요. 그러다간 죽습니다. '내려놓을게 없는 스님들' 따라 괜히 억지로 내려놓으려 하다간 '내려놓을게 산더미인 우리들'은 홧병으로 죽습니다.


왜 괴롭습니까? 내 인생이 한심하고 내 팔자가 하도 더러워서 그렇습니다. 이런 팔자를 타고난 것도 내탓이라면 내탓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탓은 아닙니다. 마음탓이 아니니 아무리 마음을 다그쳐도 해결이 안됩니다. 더럽게 꼬이기만 하는 내 인생이 저주스럽습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긋지긋한 남편과 지옥 같은 그 집에서 홀가분하게 나와버렸습니다. 다 큰 새끼들 돌봐줄 필요도 없고 요란하게 죽어가는 시에미 보살필 필요도 없습니다. 나와서 더 튼튼하고 책임감 있는 남자 새로 만나서 팔자 고치면 됩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때려 죽일년’ ‘저만 살겠다고 뛰쳐나온 년’이라는 꼬리표가 붙자 일하던 식당에서도 짤리고, 투실투실 내 몸뚱이와 찌글찌글 내 얼굴로는 팔자를 고치기는커녕 어디가서 하루 잘데도 마땅찮습니다. 괴로움을 피해 도망쳤건만 훨씬 더 괴로워지기만 했습니다.



이 괴로움들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곤 완전히 피하는 길 밖에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큰맘먹고 출가를 했습니다. 큰 스님을 만났습니다. 스님이 그럽니다. ‘모든 괴로움은 다 당신 마음이 짓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들었던 것과 똑 같은 이야기인데 물 맑고 공기 맑은 산사에서 명색이 큰스님이라는 분께 들으니 새삼스레 다가옵니다. 스님을 따라 수행하며 몇 년 지내다 보니 드디어 그 괴로움에서 슬슬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 물어봤습니다. '산사 스님들은 왜 출가를 했지요?' '여기에 계속 계실 건가요?'

출가하신 계기도 참 각양각색이십니다. 정말인지 거짓말인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마음이 다스려졌다면 다시 돌아가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분들은 계속 계시겠답니다.안그런척 해도  아마 자신이 없는 듯 보입니다. 그래 놓고 새로 들어오는 행자가 산사의 물을 흐린다고 생각되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출가는 피신이 아닙니다. 속세에 돌아가서 수행하세요.’



출가 후 산사수행 몇 년만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괴로움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칩시다. 수행 덕입니까? 세월의 망각 덕입니까? 아니면 피해서 더러운 꼴 안보는 덕입니까?

제 생각엔 136입니다. 즉 [수행의 덕 1], [세월의 덕 3], [회피의 덕 6]입니다.
수행으로 내가 좀 동글동글해 지긴 했지만 그 덕은 극히 일부이고, 내가 모든걸 내려놓게 된 것은 세월이 흘러 내가 망각을 했고, 그동안 그 괴로움을 철저히 회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안 할겁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공부하고 수행해서 내가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겁니다. 그래놓곤 자기도 좀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자신있으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베풀면서 살게요?
근데 그런 스님 보셨습니까? 전 못 봤습니다.

제 하니브로 동기중 두명이 출가를 했었습니다. 하나는 스님노릇을 하는듯 하다가 파계를 했습니다. 출가하기 전엔 보험회사 다녔었는데 나와서는 맥주집을 한다고 합니다. 굉장히 영리한 친구인데.. 나중에 만나면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왜 파계를 했는지.

또 한친구는 파계했다는 소식이 없으니까 아직 스님노릇을 계속하는 모양입니다. 이 친구도 굉장히 영리한 친구인데..만나면 꼭 한번 물어보겠습니다.왜 아직 거기에 있는지.


(이 사진에 그 두친구가 다 있습니다.)


제가 오늘은 좀 극단적으로 말을 했는데, 미안합니다.
수행은 필요합니다. 수행이 뭔지, 어떤 사람에게 수행이 필요한지 이야기해 봅시다.


→ 수행? 깨달음? 1 – 그게 뭔데?
→ 수행? 깨달음? 2 – 도대체 뭘 깨달아?
→ 수행? 깨달음? 3 – 괴로워서 출가했을 뿐
→ 수행? 깨달음? 4 – 무아의 경지?
→ 수행? 깨달음? 5 – 수행자를 왜 존경?
→ 수행? 깨달음? 6 – 괜히 헛심 쓰지 말고
→ 수행? 깨달음? 7 –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