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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수행? 깨달음? 5 - 수행자를 왜 존경해야 하지?

킥복싱이나 격투기 하는 사람들이 하는 훈련중 가장 고통스러운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쬬인타’ 강화훈련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와 같은 맹맹한 쬬인타를 가졌다가는 실력발휘고 뭐고 없이 쪼인타 한대 까이자마자 바로 고꾸라질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 쬬인타 강화훈련에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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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가 얼마나 아픈지는 제가 잘 압니다. 군대에서 고참셰이 하나가 이 쬬인타 까는데 아주 명수였습니다. 정신이상자라고 느껴질 만큼 악독한 새끼였지요. 그 악독한 새끼는 매일밤 자기 불침번 시간에 쫄따구들을 깨워 쬬인타를 깠었는데, 워카발로 쬬인타를 강타당하면 제아무리 장사라도 그대로 무너집니다. 처음엔 쬬인타 전체가 놀랄만큼 퉁퉁 붓습니다. 부은 쪼인타를 또 까이면 그건 거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참 희한했던 건 그 통증의 강도가 현저히 줄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심하게 붓지도 않습니다. 살짝만 부딪혀도 눈물이 나도록 아프던 그 쬬인타가 그렇게 매일 까이니 ‘상당히’ 덜 아프더란 말입니다.

이거 쬬인타가 강해지는 걸까요? 물론 쬬인타 부근의 근육이 두터워지고 피부가 두터워지고 단단해 지겠지요. 그러나 핵심은 그게 아니라 ‘신경이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한겨울을 빼놓곤 부대영내에선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만 다녀야 했었습니다. 꼴통부대장이 오면 이렇게 병사들이 고생합니다. 처음엔 걸음을 걷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습니다. 어거저거 이상한 걸음을 걷게 되는데 며칠 지나면 그런대로 열과 오를 맞춰서 군가를 부르면서 걸을 정도로 익숙해 지다가 나중에는 빠르지 않은 구보까지도 가능해 집니다. 발바닥이 얼얼하고 아프고 발가락이 살짝 작은 돌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나동그라지도록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나중에는 슬슬 뛰어도 괜찮더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눈에 띄게 발바닥이 두배로 두꺼워지거나 발가락이 두터워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역시 감각이 무디어 지는 것이었습니다.


산사에 틀어박혀 또는 그것도 모자라 암자나 굴로 기어 들어가 그곳에 틀어박혀 수행하는 사람들. 잘때에도 눕지 않고 앉아서 자는 사람들.. 이 사람들 거기서 도대체 뭐하는 걸까요?

다른게 아닙니다. 바로 ‘쬬인타 강화훈련’을 하는 겁니다. 버리고 온 새끼들 얼굴을 떠올려도, 자식걱정에 밤을 지새우시는 어머님 얼굴을 떠올려도, 새끼들 키우느라 고생할 마누라 얼굴을 떠올려도, 내가 떼어먹은 돈 때문에 하늘이 무너져버린 사람들을 떠올려도 마음이 별로 아프지 않게, 백억원이 든 돈가방이 눈앞에 떨어져있어도, 이효리가 벌거벗고 한번 하자고 달려들어도 꿈쩍 하지 않도록 쬬인타 강화훈련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처럼 보통사람들에게도 수행이라는 것은 바로 무감각훈련을 하는 겁니다. 울퉁불퉁한 내 마음의 가시와 끈끈이들을 동글동글하게 뭉개버리는 과정입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스러지는 것을 정확히 보고 그것을 털어내어 버리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이걸 ‘모든 괴로움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라고 표현하고 ‘그걸 알 수 있게 깨어있는’ 훈련이 바로 수행입니다.


다시 킥복싱으로 갑니다. 쬬인타강화훈련을 아무리 많이 해도 약간 아프긴 아픕니다. 통증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변의 신경을 모두 절단해 버리면 될겁니다. 아무런 통증이 없겠지요. 그러나 다리가 남아날까요? 머지않아 다리는 썩어들어가기 시작하여 다리 전체를 절단하게 될겁니다. 왜냐하면 신경은 통증만 전달하는게 아니라 생체가 살아있기 위한 기본 생명망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능, 욕망이란 것도 우리가 살아있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원동력입니다. 인간의 본능과 욕망이란 게 극한 수행을 통해 ‘내려놓는다’고 아예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내 몸이 살아있는 한 그것 역시 늘 살아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튀어오릅니다. 따라서 세상에 섞여 살면서 이 욕망을 ‘완전살해’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본능과 욕망을 완전히 끊는다면 곧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걸 완전히 끊어버리겠다고 세상과 절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리를 갈구하면서 세상의 모든 환락을 등지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낳아놓은 새끼도 버리고, 봉양해야 할 부모도 버리고, 깔아놓은 빚덩이도 뭉개고 그렇게 훌훌 털고 ‘확 머리깎고 중이나 될란다’ 하고 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떨 때 이런 이야기들을 하나요? 세상에 치이고 받쳐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헤쳐나갈 돌파구가 없는 듯 보일 때 흔히 이런 말들을 하곤 합니다. 물론 산사생활이나 시골 농사가 도시생활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이지요. 세상의 환락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용기있는 행동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고통을 피해, 세상에서의 책임도 내 팽긴채 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비겁한 도망이기도 합니다.



저는 산사의 수행자들을 그리 높이 보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극히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고 나약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아닌 분도 있지요.

수행을 위해 산으로 들어가는 것. 비유해 볼까요?
절대고수들과 악령들이 우글거리며 피바람이 휘몰아치는 중원입니다. 그곳에서 나약한 내몸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결국 그것을 못견뎌 물 맑고 공기 좋고 아무도 괴롭힐 사람 없는 깊은 산으로 피해 들어가 혼자서 ‘무공’을 연마하는 형국이지요. 대련하지 않는 그 무공이 어떤 쓰임새가 있을까요? 싸움을 해본 사람은 압니다. 싸움은 할수록 늡니다. 태권도장 거울 앞에서 골백번 연습해서 자세가 좋다고 해봐야 실전에선 경험 많은 ‘개싸움’앞에 턱없이 무너집니다. 물론 만화나 무술영화에서는 산속이나 감방에서 무공을 연마한 사람이 중원에 나와서도 내공 육십갑자로 펄펄 날기는 합니다만 그건 영화이야기지요.


우리가 산사의 수행승을 존경하는 것. 이것도 비유해 볼까요?
피바람부는 중원에서 고수들과의 일전에서 크게 부상을 당한 무사가 산으로 쫓겨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부상이라곤 전혀 없는 산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아니 이 험악한 세상에서 이리 부상하나 없이 말끔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무사는 그 산사람이 무공이 워낙 높아서 부상을 당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사부님으로 모십니다. 그러나 그가 부상을 당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이 그의 무공이 높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싸움이 없는 곳에 살면서 싸움이란 거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싸움이 없으니 부상이 없는 건 당연하지요.


→ 수행? 깨달음? 1 – 그게 뭔데?
→ 수행? 깨달음? 2 – 도대체 뭘 깨달아?
→ 수행? 깨달음? 3 – 괴로워서 출가했을 뿐
→ 수행? 깨달음? 4 – 무아의 경지?
→ 수행? 깨달음? 5 – 수행자를 왜 존경?
→ 수행? 깨달음? 6 – 괜히 헛심 쓰지 말고
→ 수행? 깨달음? 7 –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