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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수행? 깨달음? 4 - 무아의 경지?

깨달음을 정의하는 말중에 무아의 경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는 그런 경지라고 합니다. 그것이 초절정의 경지인지, 극한 상황에서의 환각인지, 정신이 조금 돈 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무아의 경지를 이해하려면 비슷한 경지를 찾아보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통해 오르가즘에 다다랐을 때 맛보는 경지입니다.


실제로 이 순간에는 뭐.. 별로 다른 생각이 없지요. 모르겠습니다.. 이런 순간에도 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는. 깨달음에서 이야기하는 무아의 경지도 이처럼 '아무 생각이 없는 순간'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아니라고 항변하시겠지만.. 만약 진짜 그렇다면, 섹스 없이도 이렇게 무아의 황홀경에 빠져들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솔깃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해도 수행을 통해 사람이 이렇게 아무런 생각자체를 하지 않는 무아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자연스럽습니다. 식물인간과 무엇이 다른가요? 이런 경계는 있을 수도 없지만 설사 있더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저 혼자만 싸고 마는 ‘자위행위’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깨달음에서 이야기하는 무아의 경지란 일어나는 마음이 아예 없거나 인간의 본능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그 비슷한 언저리에 어떤 경계는 분명히 있겠지요. 그러나 쇳덩이로 만든 로봇이 되어버리지 않는 이상 인간의 본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이 그걸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동물의 본능 본성에서 완전히 탈피 한다는 것은 자연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어찌 인간이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르게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것을 어찌 인간이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비슷한 경계에 다다른 극히 일부의 사람이거나, 환상 혹은 정신병증으로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들이겠지요.

만약 그렇게 자기의 의식세계를 완벽하게 콘트롤하는 경지가 있다고 칩시다.


여기서 잠깐, 칠팔년전쯤 UC얼바인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본 어느 환자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 환자는 뇌사(뇌의 모든 기능은 죽고 심장만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인공호흡기로 호흡만 유지시키면 계속 살아있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고 식물인간 (뇌의 기능중 뇌간(생명중추)만은 살아있어서 기본 생명활동(호흡, 소화, 심박)이 자발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상태)상태의 환자였습니다.


모든 바이탈 사인이 자동으로 체크되고 그에 따라 약물도 자동으로 주입되는 그런 병실에서 환자가족들과 의료진이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치료법을 한번 시도해 보느냐, 위험하니까 포기하느냐.. 결국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리는 순간, 갑자기 환자의 모든 바이탈계기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혈압은 400을 육박하고 심박수는 250.. 대뇌의 기능은 정지되었고 생명중추만이 살아있다는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가 자기가 소생할 수도 있는 마지막 기회를 가족들이 포기하는 걸 보고 격렬하게 반응을 했던 것입니다. 딸이 울부짖었습니다. ‘아버지가 듣고 계셔! 아버지! 해볼께요, 해볼께요..’ 식구들도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 졌습니다. 아들도 말했습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해보겠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환자의 모든 바이탈 사인이 그제서야 정상으로 내려갔습니다.


도대체 인간 의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신경세포들과 화학물질들의 작용일까 아니면 그 이상일까? 의식의 居所는 도대체 어디일까? 이런 것이 바로 ‘유체이탈’ 혹은 ‘혼절’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인가? 여러 의문이 한동안 떠나질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때 확신한 것은.. 대뇌가 죽었어도 남아있는 의식이 끝까지 뇌간의 생명활동을 붙들고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의사들이 말 하듯 대뇌는 죽었어도 뇌간이 살아있기 때문에 생명활동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의식세계는 생명활동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게 된 계기였습니다.

여기에서 착안하여 생각해봅니다. 의심스런 '도사님'들이 의식세계를 완벽하게 조절하느냐 못하느냐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난번 ‘깨달음의 그늘’에서 제가 얘기한 건 장난이 반 이었지만 실제로 방법이 있습니다. 일반사람들이 조절할 수 없는 것을 조절하는 걸 보여주면 됩니다. 혈압이나 심박등 뇌간이 관할하는 움직임이나 장의 연동운동등 비교감신경이 관할하는 것을 맘대로 조절하는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이것을 조절하지 못하면서 자기의 의식세계를 조절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에 대해선 앞으로 제가 더 머리를 쥐어짜 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말이 조금 새면서 길어지고 있는데..
어쨌든 깨달음의 세계에서 이야기 하는 무아의 경지, 그것은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리 깨달은 사람일지라도 사물과의 접촉을 통해 시시각각으로 생각과 느낌은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다만 깨달은 자는 그것이 일어나고 머물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지 않을 뿐일 겁니다.

자.. 드디어 나왔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집착에 대한 것입니다.

끈끈이까지 끝에 달라붙어 있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바로 이 집착입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동글동글한 사람들은 아무 문제없이 굴러가는데 이렇게 울퉁불퉁 가시가 돋거나 끝에 끈끈이가 묻어 있는 사람들은 사사건건 사물이나 사람에 부딪히고 걸립니다. 그래서 이들은 늘 괴롭습니다. 괴로움이 많으면 그걸 없애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 수행? 깨달음? 1 – 그게 뭔데?
→ 수행? 깨달음? 2 – 도대체 뭘 깨달아?
→ 수행? 깨달음? 3 – 괴로워서 출가했을 뿐
→ 수행? 깨달음? 4 – 무아의 경지?
→ 수행? 깨달음? 5 – 수행자를 왜 존경?
→ 수행? 깨달음? 6 – 괜히 헛심 쓰지 말고
→ 수행? 깨달음? 7 –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