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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수행? 깨달음? 2 - 도대체 뭘 깨달아?

도대체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모든 수행이나 종교의 궁극적인 체험을 깨달음이라 한다면 분명히 그 깨달음에는 객관성이 있거나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의 보편성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깨달음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깨달음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깨달았다는 당사자 이외의 사람은 그 진위여부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깨달았다는 사람의 체험을 듣고 그것을 이해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아니면 무시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의 정의도 참으로 가지각색입니다. 불교에서 한번 봅시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이유를 불문하고 나를 사랑하시고 보호해주시는 신’이란 게 없습니다. 무조건 신에게 복종하고 따르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인간 개개인을 존중하고 저마다의 자유의지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수행과 깨달음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말씀하시는 스님에 따라 천차만별이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깨달음의 정의를 보겠습니다.
四聖諦 입니다. 네가지의 聖스런 諦 (지혜)라는 뜻이겠지요. 물론 이것도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제자들의 글(범어)을 다시 한자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 많은 첨삭이 있었겠지만 일단 이걸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보기로 합니다. 지난번 ‘깨달음의 그늘’에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1.“迷惑인 이 世間은 모두가 苦다.” 하는 것이니 이것이 苦聖諦다.
2.“苦의 原因은 愛着과 執着이다.” 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集聖諦다.
3.“이를 완전히 없게 한 것이 苦가 없는 眞實한 境界이다.” 하니 이것이 滅聖諦다.
4.“이런 境界로 가자면 八正道를 닦아야 한다.” 하는 것이니 이것이 道聖諦다.

四諦 가운데 苦와 集은 迷妄의 世界의 結果와 原因을 밝히고 있으며 滅과 道는 깨달음의 世界의 結果와 原因을 가르치고 있다..운운

이걸 읽다보면 짜증이 나면서 오히려 괴로움이 생깁니다. 조금 쉬운 말로 해봅시다.
1. 괴로움을 느끼고(parinnaa), 2. 그 괴로움의 근원을 알고(pahana),
3. 그것을 소멸시키고(sacchikiriya), 4. 그 모든 과정을 깨친다(bhavana).

훨씬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이걸 다시 우리 일상과 비유해서 봅시다.

1. 샘물이 있는 숲에 물 마시러 갔다 왔는데 등짝이 따끔따끔하고 많이 아픕니다.
2. 왜 그런지 거울로 비춰봤더니 등짝에 큰 가시가 꽂혀 있습니다.
3. 그래서 그걸 뽑았더니 통증이 없어졌습니다.
4. 이제부턴 숲에 가면 가시에 찔리지 않게 조심하고 혹시 찔렸더라도 그걸 바로 뽑습니다.



이거 아닌가요?
‘안 괴로워지는 방법을 알면 그게 깨달음’이라는 뜻 아닌가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후배들, 어렵게 꼬는 것이 특기인 사람들의 말장난이 더해지면 이 간단한 것이 참으로 접근하기 어려워 보이는 개념이 되어버립니다. 딸린 부가해설들은 더더욱 가관입니다. 그걸 읽다 보면 울컥 울컥 화가 솟습니다. 괴로움을 없애라고 부처님께서 주신 ‘질서있고 단순한’ 원리는 멀리 사라지고.. 오히려 ‘괴로움’만 점점 커집니다.
건강한 사람들마저 겁주고 얼러서 오히려 병을 늘리고 키우는 의사와 비슷해 보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게 사성제 즉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이다’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들 괴로움의 원천은 어디인지 그것부터 따져봅시다. 어렵게 말하면 고성제와 집성제이겠지요.

스님들의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서 누구나 대답합니다. "괴로움의 원천은 ‘내 마음’입니다. 모든 괴로움은 내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들 괴로움의 원천이 오직 우리들 마음입니까? 아닙니다. 괴로움을 느끼는 곳이 우리 마음이지, 괴로움의 원천이 마음인 것은 아닐 겁니다.


아침 출근길, 짜증나게 막히는 동부간선도로를 벗어나 강변도로에 다다르고 다리를 건너 강남으로 출근을 합니다. 아침 출근길이라 워낙 차가 많기 때문에 다리로 진입하는 맨 끝 차로는 몇백미터씩 차가 늘어섭니다. 십여분의 지루한 기다림이 끝나 드디어 내가 다리근처에 다다랐을 때입니다. 남들은 십분씩 기다리면서 차례대로 진입하는데, 줄 안서고 2차선으로 쭉 달리다가 다리 진입로 직전에 깜박이를 켜고 새치기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핏 보니 생긴 것도 더럽고 치사하게 생겼고 끼어들고선 미안하거나 고맙다는 신호도 안 합니다.

이럴 때 일어나는 분노와 짜증의 원인이 내 마음입니까? 더러운 놈이랑 치고 받기 싫어서 그냥 참는 이 괴로움의 원천이 내 마음입니까? 내가 내 마음만 다스리면 이 괴로움이 없어집니까?


이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은 몇가지 있습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멸성제, 도성제이겠지요.

첫째, ‘굉장히 바쁘신 분들이신가 보다. 빨리 새치기 하시게 도와 드려야지’ 하거나,
‘그렇게 살다 죽어라.. 하지만 틀림없이 그 업보를 받을 게다’ 하거나,
‘이것도 다 세상의 일부이지’ 그러려니.. 하면 됩니다.
내 마음은 일단 정리가 됩니다.

둘째, 차에서 내려서 그들을 물리력으로 제압하고 강변로 따라서 그냥 보내면 됩니다.
뒷사람들의 박수도 듣고 정의사회 구현에 한 몫 한 것 같아서 뿌듯합니다. 그러나 매일 아침 이 짓을 한다는 건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됩니다.

셋째, 경찰에 연락해서 교통경찰이 이곳을 단속하게 만들면 됩니다. 혹시라도 끼어들면 고액의 딱지를 떼면 됩니다. 고액의 딱지를 떼면서라도 급한 사람은 새치기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질서를 기다리겠지요. 새치기를 했어도 그가 대가를 지불한다면 전혀 열 받지 않습니다.

넷째, 모든 국민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면 누구나 할 거 없이 질서를 지키게 됩니다. 선진질서의식 함양에 국가나 사회, 종교단체들이 나서서 국민들을 계몽합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국민 모두가 상대방을 깍듯하게 배려하는 이상국가가 될 것 같습니다. 다들 웃으셨겠지만.. 이런 날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보다시피 ‘얌체 끼어들기에 대한 스트레스’라는 아주 간단한 예이지만 해결방법이 간단치 않습니다. 우리들 괴로움의 원천은 고상한 스님들의 말씀처럼 내 마음이 일으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수양을 하면, 혹은 얼마나 수행을 하면 이 얌체들의 끼어들기에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을까요? 그리고 또 설사 내가 내 마음을 다스려 내 마음이 편해졌다 하더라도 과연 그게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한 정정당당한 행위일까요?


우리들 괴로움의 원천은 우리가 ‘세상에 속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겪는 괴로움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지 않는 한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완전히 떠나지 못한다면 세상과 떨어져 있기라도 해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그래서 출가를 하고 산사에 틀어박혀 수행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출근하시던 스님들을 서울의 아침 출근 길, 똑 같은 상황에 모셔다 놓아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 수행? 깨달음? 1 – 그게 뭔데?
→ 수행? 깨달음? 2 – 도대체 뭘 깨달아?
→ 수행? 깨달음? 3 – 괴로워서 출가했을 뿐
→ 수행? 깨달음? 4 – 무아의 경지?
→ 수행? 깨달음? 5 – 수행자를 왜 존경?
→ 수행? 깨달음? 6 – 괜히 헛심 쓰지 말고
→ 수행? 깨달음? 7 –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