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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팡생각

망년회에 대한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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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2월이면 남자들은 참 바쁘다. 참석해야 할 모임이 많기 때문이다. 기를 쓰고 참석한다. 그리곤 은근히 뽐낸다. ‘죽겠어.. 오라는 데는 많고 몸은 죽겠고.. 꼭 가야할 데만 골라서 가도 일주일에 서너군데는 되네.. 죽겠어 띠바, 이러다 올해 못 넘기고 죽을지도 몰라’.. ㅋㅋ 띠바 지랄하고 있다.

내가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가졌던 모임을 보자. 직장 송년회(부서별, 동기별, 친한 사람들끼리) 3~4회, 직장과 관련된 곳에서의 접대성 모임 3~4회, 동창 모임 3~4회, 기타 모임 2~3회다. 12월 한달동안 최소 10번, 최대 15번정도 모임이다.

일부 남자들이 떠벌이듯 일주일에 서너군데가 되려면 한달에 20군데 가까이 다닌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연말 모임이 20군데까지는 될 수가 없다. 흔히 가질 수 있는 5~10회 정도를 빼곤 나머지는 내가 억지로 모임을 만들었거나, 오라지도 않는데 기를 쓰고 참석했거나, 한 모임을 여러 번으로 찢었거나, 아님 그냥 뻥이다.

왜 남자들은 이렇게 모임의 숫자에 목을 맬까?

연말 모임 숫자를 자기 대인관계의 척도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대인관계를 확인하느라 모임의 횟수를 늘리려 혈안이다. 친하지 않던 사람이라도 무조건 연말에는 만나야 한다. ‘어이 해바뀌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지 헐헐..’ 벌써 끊어졌을 끈들을 연말에 유난히 챙긴다. 나도 이런 전화들로 인해 가고 싶지도 않은 모임에 나간 적 아주 많다.

연말에는 내가 어떤 모임의 일원임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나와 함께하는 떼거리가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님을 확인해야 한다. 오늘 보면 또 다시 내년 연말모임에나 얼굴을 보게 될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연말엔 꼭 만나 생사를 확인하고 우리가 아직 알고 지내는 사이임을 확인해야 한다.

불쌍한 남자들이다. 무시무시한 현대생활에서 나 혼자라는 느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 어떻게 누구와 만날지 모르는 현대생활에서 연말 모임은 살아 남기 위한 처절한 전투장이며 미래에 대한 안심보험이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임을. 그래도 12월엔 여전히 바쁘다. 불러주는 곳이 많으면 참석하느라 바쁘고, 불러주는 곳이 없을 때에는 조바심에 애를 태우다 모임을 만들어 내느라 바쁘다. 올해도 여전히 생존을 위해 전투적으로 만난다. 그러나 남는 건 쌓이는 피로와 높아진 간 수치, 밀린 카드청구서 그리고 허탈감이다.

그래 다 알어.. 알지만 그래도 전화가 오면 안심이 되고 반갑다. 아직은 내가 살아 있구나.
‘어 그래? 당연히 만나야지 헐헐..’

이렇게 기를 쓰고 만나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할까? 술 마시고 흥청망청 노는 게 다다. 술 퍼마시고 널부러지는 게 시작이고 끝이다. 한때 그 선봉에 내가 있었다. 일차로 끝낸다는 것은 마초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으며, 맨 정신에 집에 일찍 들어간다는 것은 술에 대한 모독이라고 믿었었다. 기어이 밤을 새워 새벽 이른 별을 보는 것만이 모임의 완결이라고 믿었었다. 얻는 게 뭔지, 잃는 게 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건 연말 모임뿐만이 아니었다. 그냥 느낌대로만 살아도 모든 게 풀려주니 그런게 내 인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이란 걸 별로 하지 않고 살았었다. 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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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살며 청룡열차를 탔다.
나도 드디어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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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다. 여우가 죽을 때 자기가 살던 언덕을 향해 머리를 두는 습관이라든가. 여기서 정확히 어떤 뜻으로 초심(初心)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몰라도, 우리는 흔히 이 초심이라는 말을 ‘처음에 품었던 뜻’으로 사용한다.

어느 정도 인생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삶의 불행은 모두 초심을 잊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걸. 종교인이 초심을 잃으면 혹세무민을 일삼으며, 정치인이 초심을 잃으면 모리배로 전락하듯, 사람들이 초심을 잃으면 그것이 불행의 단초가 된다.

우리는 많은 초심들을 가지고 있다. 연애를 하면서 가졌던 초심도 있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초심도 있고, 사십대가 되면서 가졌던 초심도 있다. 가깝게는 올 초에 가졌던 초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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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2월에 남자들이 헐떡이는 연말 모임들을 '망년회'라 부른다. 일본에서 섣달그믐께 친지끼리 모여 노는 걸 忘年이라 불렀다는데 우리는 그 말을 그대로 쓴다. '망년회'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한 해(年)를 잊는(忘) 모임(會)'이란 뜻이다. 지난 한 해의 즐거웠던 일, 괴로웠던 일을 모두다 한잔 술에 날려보내자는 의미이다. 먹고 마시며 한 해를 지워버린다는 뜻의 '망년회'다.

좋다. 우리가 갖는 망년회들이 생존을 위한 처절한 전투적 모임이 아니라 이렇게 잊자는 뜻의 낭만적인 망년회라고 치자. 그러나 먹고 마시며 한해의 무엇을 잊겠다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봐야 잊을 일 별로 없다. 나이가 들어 머리속에 남아있는 것도 별로 없는데 뭘 더 잊겠다는 것인가. 자꾸 잊어서 걱정인 사람들이 뭘 잊겠다고 그리 따로 자리를 내어가면서 흥청망청 하는가?


12월은 한 해의 마지막이다. 술 마시고 흥청망청 놀기에는 너무 아쉬운 한달이다. 한 해를 겸손하게 되돌아보고 새해를 준비하기에도 과히 넉넉치 않은 시간이다. 안다. 연말모임이 전부 흥청망청 그런건 아니다. 진짜로 만나고 싶었던 얼굴들이 모이는 모임도 있고, 부득이 소홀했었지만 연말에라도 꼭 자리를 함께 해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할 수도 있고, 이러저러 진짜로 필요한 모임들이 있다.

올해엔 이렇게 꼭 필요한 모임에만 나가도록 해보자. 불필요한 모임 억지로 만들지 말고, 부르지도 않는데 끼이지 말고, 반갑지도 않은데 굳이 나가지도 말자. 조바심 내지 말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올 12월엔 좀 다른 모임을 가져보자.
꼭 같이 하고픈 사람들과 조용한 산장에라도 가자.

가뜩이나 나이 들어 노여움만 많아져 사람들과 다툼이 많이 생기는데
가뜩이나 사는 모습에 차이가 나면서 사람들과 서먹해 지는데
지난 한해엔 내가 또 어떤 고집을 부려서 가깝던 사람과 멀어졌나
지난 한해엔 내가 또 얼마나 잘난 체를 해서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나

우리가 잊었던 초심이나 돌아볼 일이다. 올 12월엔.

이놈의 미국선 하도 모임이 없어, 약이 올라서 그냥 초 치느라 해본 소리다.띠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