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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팡생각

나잇값

1. 단골이던(돈 없는 날은 소주를 마셔도 되고, 밴드 대신 통기타를 치고 놀아도 되고, 아가씨들이 팁 없이 자발적으로 들어와 놀 정도로) 종로의 한 룸살롱에서 친구들끼리 모여 노는데.. 친구 한 명이 일이 있다며 먼저 일어섰다. 자기 계산 몫을 주면서 그 친구가 이랬다. ‘니네 아직도 이런 데가 재밌냐? 띠바 철 좀 들어라 철 좀’ 의외의 일격에 약간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반격을 가했다. ‘넌 이런 데가 재미없냐? 니가 이상한 새끼지. 애늙은이 띠바넘아’ 당시 우린 이십대 후반 총각들이었다.

2. 칠팔년전 테니스를 열심히 치던 무렵 한 남자에게 테니스를 권했었는데 그 사람의 대답, ‘이 나이에 테니스를 하는 건 좀 방정맞아 보이지 않을까요? 공 따라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띠바 그럼 우린 뭐야? 대학때엔 자기도 테니스를 쳤었지만 이젠 나이가 들었으니 테니스는 좀 그렇단다. 당시 그 남자의 나이는 40대 중반이었다.

3. 얼마전, 오랜만에 동창 모임에 나갔다 온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아직도 철이 안 들었어 들’ 옛날 얘기로 낄낄대는 친구들이 철 없어 보였단다. 그들의 나이 40대 후반이었다.

4. 가끔 블로그 댓글에 ‘이 개 %%$#^%&꺄. 보아하니 낫살 좀 쳐먹은 새끼 같은데, 븅신아 철 좀 들어라’ 같은 게 있다. 분명 새파란 것들일텐데.. 지우면서 나도 욕 한마디 꼭 한다.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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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잇값
‘나이깝 쫌 해라.. 철 좀 들어라..’ 대부분 친한 사이끼리 농담이겠지만,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사실은 조롱의 뉘앙스다. 농담인줄 알고 들어도 기분 나쁘다. ‘나잇값을 하라’는 말은 아마 ‘나이에 맞게 행동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청년은 청년답게 발랄하고, 중년은 중년답게 중후하고.. 뭐 이런 거. 맞는 말이다. 매사에 ‘나이에 맞게 사는 것’이 보기에 좋다. 젊은 것이 너무 무겁거나, 늙은 것이 너무 가벼우면 보기에 안 좋은 건 맞다.

하지만 나잇값이나 철은 턱 봐서는 바로 보이지 않는다.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지켜봐야 보이는 법이다. 그렇다면 속으로부터 우러나온다는 ‘나잇값, 철’이란 게 과연 뭘까? 나잇값이란 원래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터득한 지혜’ 혹은 ‘그 또래에게 암묵적으로 부여된 기대’라는 좋은 의미이다. 또 ‘철’은 계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철이 든다’라는 말은 계절의 변화를 알아 봄철이 되면 봄에 맞게, 여름철이 되면 여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 다 분명히 좋은 의미, 한마디로 지혜롭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어 갊에 따른 지혜.. 듣기만 해도 향기롭다.


나쁜 나잇값
그러나 ‘나잇값’이나 ‘철’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경우에 따라선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다.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에게 ‘이제 나잇값 좀 해라’ 라고 하는 것은 딴 게 아니라 이제 그만 ‘불의와 타협할 줄도 알라’는 의미이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맞는 말이기도 하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사회구조상 사람은 반드시 철이 들어야 한다. 그래야 밥 먹고 산다. 하지만 이 나잇값은 그리 향기롭지는 않고 오히려 씁쓸하다. 하지만 이것도 나잇값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건 나잇값이 아니다. 그냥 더럽고 부끄러운 때다. 따라서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 철 들라고 하는 것은 ‘이리와서 같이 더럽게 살자’라는 말밖에는 아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아무리 깨끗하던 사람도 때가 끼이게 마련이며 상당부분 불가항력이긴 하다. 그래서 대부분 서로 암묵적으로 이해해 주면서 살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자랑스러운 건 결코 아니다.


나잇값과 철의 본질
나잇값과 철의 본질은 대략 네가지다. ①경험으로 쌓인 지혜, ②노화에 따른 자연스런 행동양식의 변화 ③불의와 적당히 타협하기, ④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내가 억지로 만든 삶의 패턴이다. ①과 ②가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긍정적인 나잇값이고, ③과 ④는 세월에 지쳐 가식으로 휘감은 부정적인 나잇값이다.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우리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저절로 갖게 되는 것은 서로 같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큰 편차는 있다. 좋은 나잇값은 없이 나쁜의 나잇값만 넘치며 호의호식하며 산다든가, 좋은 나잇값은 넘쳐나지만 나쁜 나잇값이 없어서 힘들게 산다든가. 아니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렇고 그렇게 평범하게 산다든가.

자기 나잇값의 어디까지가 지혜이고 어디부터가 굴종인지는 아무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자기 나잇값 못하는 건 모르고 남 철없다 욕하고, 때묻고 되바라진 자기를 철든 거라고 착각하기만 한다. 내가 젊은 감성을 누르고 불의와 타협하는 건 나잇값 하는 거고, 남이 그러면 돈에 굴복하고 똥가오잡는 늙은 속물이다. 내가 감성을 살리며 양심을 부르짖으면 젊은 정의의 사도이지만 남이 하면 철이 없는 거다. 다른 사람의 좋은 나잇값은 보지 못하고, 내 나쁜 나잇값은 못 본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다.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산다.


안 해도 되는 나쁜 나잇값
‘불의와 타협하기’. 아무리 정의의 사도였다 할지라도 부양가족이 생기면 이게 불가항력일 경우가 많다. 크든 적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건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남의 눈 의식해서 내가 치장한 나잇값, 이건 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자. 몸에 기운이 없어서 발랄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선 남의 눈 때문에 발랄할 수가 없다는 거, 그래서 ‘쟨 아직도 저리 철이 없니? vs 쟨 벌써 완전히 할머니야’가 되는 거 바로 이거다. 대표적인 게 옷차림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당연히 나이에 맞게 옷을 입어야 하는 걸로 안다. 그래서 젊은 시절 입던 옷이나 유행하는 멋진 옷들을 외면하고 이모 삼촌, 부장님 이사님이 입던 옷들을 자기도 입는다. 설사 입고 싶은 젊은 옷이 있어도 못 입는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책 잡히고 나잇값 못하는 주책푼수로 여겨질까봐서이다. 그래서 멀리서 옷차림만 봐도 그 사람의 나이가 짐작된다. 나 아저씨 나 아줌마..광고를 하면서 옷을 입으니까.

그러나 이거 큰 착각이다. 옷이란 자리에 따라 맞춰 입는 거지, 나이에 따라 맞춰 입는 게 아니다. 정장을 포멀하게 맞춰 입어야 하는 자리엔 그렇게 입고, 그렇지 않은 자리엔 자기 입고 싶은대로 맘대로 입으면 된다. 체형이 허락하는 한 젊게 입어야 한다. 그러나 중년의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아저씨 아줌마로 옷을 입는다. 룰을 깬 또래를 보면 ‘저 미친년 주책이야’ 흉을 본다.

대화의 주제에서도 그렇다. 친구들끼리 만났는데도 수십년전 얘기로 낄낄대거나, 연예인이나 드라마 얘길 한다거나, 재밌게 놀면서 살 궁리 얘길 하거나, 사회의 변혁에 대한 얘기를 하면.. 이걸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 나이엔 우아하게 건강얘기, 가족 얘기, 사업 얘기, 돈과 부동산 얘기, 종교얘기 같은 걸 해야 하며, 세상의 비리 같은 건 이제 모른 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도 천만의 말씀이다. 대화의 주제도 자리에 따라 정해지는 거지, 나이에 따라 정해지는 게 아니다. 친구들끼리라면 나이에 상관없이 그날 그날의 관심사에 따라 옛날 연애 이야기, 옛날 친구 이야기, 섹스 이야기,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아주 당연하다.


필요한 진짜 나잇값
물론 일반적으로 얘기해서 나이게 맞게 살아야 하는 건 맞다. 40대에 힙합에 빠지거나, 50대에 레게머리를 하거나, 60대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미친듯이 연애에 빠지는 건 분명히 보통사람들의 정서와는 멀다. 저년 미친년 아냐?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나이에 맞게 옷을 입고, 나이에 맞게 대화주제를 잡고, 나이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건 ‘나잇값’이나 ‘철’을 잘못 이해한 바보다. 그건 나를 숨기고 억누르고 위장하는 거지 나잇값이 아니다.

속에서부터 우러나와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깊은 지혜와 단아함, 바름과 질서, 위트와 유머.. 이런 것들이 진정한 나잇값이며 철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 없다면, 아무리 멋지게 차려 입고 말투가 고매한 신사 숙녀라도 진정한 나잇값은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그런 것을 가졌다면.. 레게머리를 한 50대 남자에게서도 아름다운 나잇값을 느낄 수 있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연애에 빠진 60대 여자에게서도 아름다운 나잇값을 느낄 수 있다.


나잇값 할까 말까
40대쯤 된 사람들은 아예 섹스를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뭘 몰랐던 탓도 크지만, 더 큰 이유는 당시 40대들의 모습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들은 ‘남자’나 ‘여자’ 성별을 구분할 필요조차 없는 그냥 아저씨 아줌마, 감성이라고는 도무지 있어 보이질 않던 삭막한 중년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가슴 떨린 사랑타령을 하다면 그건 나잇값 못하는 짓이라고 여겼었다.

근데 내가 그 나이가 되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40대들은 여전히 여자 남자, 아니 어찌 보면 어렸던 시절보다 감성적으로 훨씬 더 풍부한 여자 남자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앞선 세대들에게 함부로 편견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겪어보니 나이가 든다고 철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스무살에 철없던 놈은 나이 오십이 되어도 여전히 철이 없었다.

50대에 연애에 빠지고, 60대에 섹스에 열정적인 사람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나이 때문에 생각이나 행동이나 옷차림에 ‘우리나이엔 이래야 한다’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기로 했다. 40대에도 하늘을 날고, 50대에도 딴따라이기로 했다. 다만 좋은 나잇값은 많이 하기로 했다.

분명하다. 좀 가벼워 보이는 겉모습이라도 지혜가 있어 좋은 나잇값을 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중후해 보여도 나쁜 나잇값만 하는 사람은..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더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