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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팡생각

젊은이와 늙은이의 차이 - 사랑과 미움의 크기차이

사랑과 미움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된다는 유치한 가사.. 참 편하다. 사랑하는 듯 하다가 점 하나 찍고 남으로 돌아서 버린다니.. 물론 이런 경우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으로 포장된 애욕이나 욕망이었을 때의 얘기다. 실제로 진정한 사랑이었다면 점 하나 찍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하늘이 무너지던 실연의 충격에서 어느정도 벗어나면 사람들은 스스로 점을 찍어야 한다고 마음을 잡는다. 이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치사하게도 바로 ‘미움’이다. 시시콜콜 상대방의 약점과 단점을 확대시킨다. 자세히 보면 못 생겼어, 성격이 쪼잔해, 머리가 비었어, 부모가 무식해, 그러다 급기야는.. 저뇬 너무 헐렁해, 저쉐이 조루대왕이야..

만약 이랬는데도 점이 안 찍히면 그 다음 방법은 ‘증오’다. 내가 널 이만큼 사랑했었는데 네가 날 버리다니.. 원망과 분노가 쉽게 일어난다. 날 버리고 너 얼마나 잘되는 지 보자 썅..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봐야 점은 잘 안 찍힌다. 진실로 사랑하던 사람은 미워해도 증오해도 잘 안 잊혀진다. 실연의 아픔엔 그저 세월만이 유일한 약이다. 시간이 흐르면 사랑과 미움이 적당히 얼버무려져 세월로 희석된다. 이렇게 사랑과 미움은 숙명적으로 결탁해 있다는 걸 슬슬 안다.


사랑과 미움은 둘 다 괴롭다

不當趣所愛 (부당취소애) 亦莫有不愛 (역막유불애)
사랑함을 가지지 말라. 미워함도 가지지 말라.

愛之不見憂 (애지불견우) 不愛見亦憂 (불애견역우)
사랑하면 못 봐서 괴롭고, 미워하면 자꾸 봐서 괴롭다.

是以莫造愛 (시이막조애) 愛憎惡所由 (애증오소유)
그러므로 사랑을 짓지 말라. 사랑은 미움의 근본이니라.

已除縛結者 (이제박결자) 無愛無所憎 (무애무소증)
이미 이를 묶어 없애버린 자는 사랑도 미움도 없느니라.

두번째 줄은 누구에게나 팍 와 닿는다. 보고싶은 사람은 못봐서 괴롭고, 보기싫은 사람은 자꾸 봐서 괴롭다.^^ 그건 그렇고.. 이게 뭔가? 사랑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그냥 돌처럼 살라는 말이더냐? 우리가 벌레냐 이렇게 살라하게. 그렇다. 이런 경지는 산속에 쳐박혀 수행만 하는 중들에게도 불가능한 경지다. 그들도 ‘그런 척’ 정도나 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경지이다. 어찌 좋아하고 싫어함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든가. 혹시 부처나 예수라면 모를까.

흥분하지 말자.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 모두는 택도 없는 거니까. 이 말의 가르침은 아마 이런 정도일 것이다. ‘사랑이 오면 사랑하되 너무 집착하지 말고, 미움이 오면 미워하되 너무 오래 하지는 말라’는. 근데 말은 약간 쉬워보이지만 이것 역시 어렵긴 매한가지인 건 사실이다.

이 어려운 사랑과 미움이라는 감정의 정체를 알기 위해 한 실험이 있었다. 성인남녀들을 대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의 사진을 각각 보여주면서 뇌 활동의 변화를 MRI로 조사한 것이다.


사랑과 미움은 한집에 산다
그러자 두 경우 모두 ‘증오 회로’라 부르는 뇌 부분이 활성화됨을 알았다. 놀랍게도 사랑과 미움이 한 집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미움은 정반대의 감정이 아니라 거의 같은 감정이었던 것이다.


사랑이 미움보다 훨씬 더 비이성적
또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다른 부위를 비활성화시킨다는 것도 밝혀졌다. 사랑이나 미움의 감정을 느낄 때는 인간의 사고를 담당하는 대뇌 피질 부위가 비활성화되는 것이다. 즉, 사랑과 미움의 가정이 일어나면 인간은 비이성적이 된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사랑의 감정때는 광범위하게 대뇌피질이 비활성화되지만, 미움의 감정 때는 아주 일부만 비활성화된다는 점이다. 이는 사랑과 미움이 둘 다 비이성적이긴 해도 사랑의 감정이 훨씬 더 비이성적이란 뜻이다. 그래서 미움에 흥분하는 것은 가라앉힐 수 있지만,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여 이성적인 판단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된다.


사랑과 미움은 시소의 관계
이 실험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사랑과 미움의 관계에 내가 확신하는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사랑과 미움은 마치 시소와 같은 관계라는 것. 즉, 이쪽이 올라가면 저쪽이 내려가게 되어있는, ‘전체 감정의 량’은 항상 일정하게 정해져 있고 사랑과 미움이 커지고 작아지고 한다는 것이다.

아는 분중에 ‘여자는 무조건 얼굴이 예뻐야 한다’는 걸 절대명제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오십이 넘었는데 아직 결혼을 못했다.) 이 양반의 논리는 간단하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줄 줄도 알고, 성격도 좋다’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굴이 못생긴 여자는 사랑할 줄도 모르고 성격이 더럽다’라는 다소 과격한 결론. 이 양반의 주장에서 ‘얼굴’ 얘기만 빼면 수긍이 간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성격이 좋다’라는 점은 상당부분 사실인 것이다. 사랑의 감정이 충만하면 미움이나 증오의 감정이 있을 자리가 없다. 따라서 '사랑받는 사람이 성격이 좋을 것'은 정해진 이치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어 그 자리에 미움이 차있는 사람은 성격이 더러울 수밖에 없다.


늙은이들은 노여움과 눈물이 많다
사랑과 미움이 서로 시소 관계라는 것은 나이가 들면서도 알게 된다. '체형'과 '건강' 다음으로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이 사랑과 미움이라는 감정의 변화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랑의 감정보다는 미움의 감정이 더 많아진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이게 좋고 저게 좋고..’ 에서 ‘이게 싫고 저게 싫고..’ 로. 거울을 보니 그게 다 얼굴에 써있다. 미움이 가득한 얼굴.. 그러나 그것도 모르고 나이탓만 한다.

사랑에는 어느덧 밋밋해졌다. 인더언 써머처럼 젊음이 되살아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사랑이고 조시고’ 그저 먹고 사는 데에 바쁘다. 반면 이것도 맘에 안들고 저것도 눈에 거슬리고, 이 새낀 이래서 싫고 저년은 저래서 배기싫고.. 이런 맘들은 불쑥불쑥 솟는다. 젊었던 시절엔 사랑이 가득했던 그 곳에 미움만 그득한 것이다. 이러니 얼굴이 예쁠 리가 없다.

뇌의 ‘증오 회로’에 사랑은 간데 없고 미움이 가득하여 ‘공격적 행동’이 유발되고, 성난 감정을 바로바로 행동으로 옮긴다. 늙은이가 되면 얼굴도 추해지고 ‘노여움과 눈물’이 많아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젊은이와 늙은이의 차이
사랑과 미움은 같은 집에 함께 사는 사이다. 그래서 사랑이 커지면 미움이 줄어들고, 미움이 커지면 사랑이 줄어든다. 젊은이와 늙은이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사랑과 미움의 비율. 늙은이들은 미움이 절대적으로 많고, 젊은이들은 사랑이 절대적으로 많다.

젊고 싱싱한 애들을 보면 상쾌하다. 사랑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바라만봐도 생기발랄 유쾌하다. 반면 일부 늙은이를 보면 짜증이 난다. 미움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언제 보아도 추해보인다. 눈에 거슬려하는 게 많아 궁시렁궁시렁 불만만 많다.  

오늘 다시 한번 돌아보자. 내 증오회로에 사랑과 미움이 얼만큼씩 있는지.. 근데 자기 마음 그릇은 잘 못 본다. 그러니 남에게 물어보고 남 얘기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내가 요즈음 어떻게 보이는지. 사랑이 남아있는 풋풋한 중년인지, 미움만 가득한 추한 중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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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의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원희양이 지금 중늙은이들을 약 올리고 있다. 띠바. 연애감정도 없지만, 어찌어찌 연애를 하고 실연을 당해도 무감감할 중늙은이들을 아주 잔인하게 놀리고 있다.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에 ‘이제 와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하는 구절이 있다. 지금 그걸 겪고 있는 젊은 분이야 ‘실연이 달콤하다’는 게 말이 안되겠지만.. 세월이 지나면 알게 된다. 실연이 얼마나 달콤했던 것인지를. 그러니 억지로 벗어나려 하지 말고 그냥 맘껏 즐기기 바란다. 벗어나려 한다고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게 바로 사랑이 가득하다는 증거니까.

우리 중늙은이들은..
실연으로 힘들어하는 원희양이 마냥 부럽슴다. 띠바.


* 조금 전, 점심 먹다가 실수로 혀 끄트머리를 깨물었다. 졸라 아팠다. 혀 깨물고 자살한다는 게 얼마나 독하고 무시무시한 일인지 알겠다. 혀를 빨리 뺏어야 하는데 조금 늦어서 아구의 상하운동에 걸린 거다. 왜 그렇게 급하게 먹느냐고 마누라에게 쿠사리 먹고.. 밥 먹다 자기 혀를 깨물었다는 게 생각할수록 황당하다. 느려진 내 혀.. 나이가 드니 별게 다 느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