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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영화 '타짜'보다 앞섰던 아이디어.. '48+1"

한 대기업의 홍보영화 하날 만들기 위해 '영화'를 만들어 본 감독을 찾기로 했다. '영화감독'이라는 사람들을 면접하는 재밌는 경험을 해보게 되었다. 감독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제대로 된 사람은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이름이 꽤 알려진 왕년의 유명감독들도 찾아오는걸 보고 놀란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우리가 선택했던 사람은 영화 Mary Jane을 만들었던 분이었다. 메리제인이라는 영화를 들어본 적도 없었고 그외에도 성공한 영화 한편도 없었지만 그를 선택했던 건 '가격문제'와 함께^^ 그의 독특함에 끌려서였다. 자기 영화의 실패를 '자기가 너무 앞서나간 탓'이라고 생각하는 분이었다. 즉 자기가 영화감독으로서 아직 성공하지 못한 것은 한국의 영화관객들의 수준이 자기의 감각을 아직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내가 감각이 좀 앞서요. 그걸 아셔야 합니다'

허세가 좀 있었는데.. 유명한 사람 이름만 나오면 무조건 ‘아 그형, 내가 잘 알지..’ 였다. 이렇게 그사람 입에서 이름이 언급된 기라성 같은 이름들의 면면은.. 권택이 형님, 일성이 형님, 종학이형, 추련이형, 형주형.. 술은 전혀 마시지도 못하면서 술병 앞에 놓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서너시간 자기 영화이야기 하기, 촬영준비 완료하고 전 스탭이 대기하고 있는데 막상 자기는 식당에서 출연자에게 술 따라주고 있기, ‘점심은 횟집가서 먹읍시다’ 하길래 횟집을 갔더니 자기는 원래 회를 못 먹는다면서 라면을 끓여 혼자 먹기.. 여러가지 희한한 행동들은 촬영스탭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는데, 특히 '한성격'하던 촬영감독과의 갈등이 극심했다. 결국 그 감독을 중간에 교체할 수밖에 없었는데.. 감독은 외부인, 촬영감독은 우리 회사 직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렇게 촬영에서 제외되고 난 서너달 후쯤, 그가 느닷없이 불쑥 나를 찾아왔다.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뭔가를 꺼내는데.. 허영만의 만화책이었다. '48+1'이라는 이상한 제목의 만화.. '이거 영화로 만들어 봅시다. 이건 무조건 되게 돼 있어요’ 원작 만화책만 들고 와서는 영화를 만들자고 하고 있었다. ‘아직 우리는 영화를 할 계획도 없고, 전 그런걸 결정할 만한 위치도 아닙니다’ 자기 이야기를 더 들어보라고, 지금 시간이 없으면 자기가 일주일 후에 다시 올 테니 만화를  다 읽어본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는 그를 그러고마고 하고 보냈었다. 물론 그때엔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영화는 하지 않기로 하고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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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후, 당시 흥행영화 몇편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던 시나리오 작가겸 영화기획자를 영입하면서(이 양반 얼마 전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대박을 터뜨렸다) 회사가 본격적으로 영화사업에 뛰어들었다. 한동안 밋밋하고 식상한 영화들로 연전연패를 하며 막대한 손실만 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문득 예전 그 희한한 감독과 그가 놓고 간 만화가 생각났다. 집에 가서 뒤져보니 다행히 예전에 그가 주고 간 만화책들이 그대로 있었다. 그 만화책을 회사 대빵에게 보여주면서 넌지시 떠 보았다. 이런 독특한 소재 어떻겠냐고. 그러나 대빵은 만화책을 들쳐보지도 않고 단칼에 묵살해 버렸다. ‘만화를 영화로 만들자고? 게다가 화투꾼 이야기를? 이 미친놈아..’ 그렇게 한국영화 최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만화 원작 도박꾼 영화는 그냥 묻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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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십몇년 후, 한국에서 화투도박꾼을 소재로 한 영화 하나가 극장가를 휩쓴다고 한다.
‘타짜'

그런데 이 영화.. 허영만의 도박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라고 한다. 허영만의 도박만화? 그랬었다. 십몇년전 이상스런 그 감독이 영화로 만들자며 내게 주고 간 만화가 바로 허영만의 만화였었다. 허영만의 최초 도박만화였던 48+1 

허영만 본인 스스로 자기 도박만화의 시발점이라고 이야기하는 작품이 바로 이 ‘48+1’이다. 이것이 기본이 되어 몇년후에 ‘타짜’가 탄생하고, 그게 요즈음 대박을 터트린 영화 ‘타짜’의 원작이 된 것이다. 그 옛날.. 이 만화 '48+1'을 원작으로 영화로 만들자는 아이디어 하나 들고 찾아왔왔던 그 분의 푸념이 떠오른다. ‘난 말예요, 너무 아이디어가 앞서나가는 게 흠이예요.. 그래서 맨날 요모냥 요꼴이지’

뭐하고 지내는지 궁금해 진다. 그때 혹시 다른 제작자를 만나서 그 영화를 만들기는 했는지.. 하지만 그런 영화를 보거나 들은 기억이 없는걸 보면.. 아예 만들지 못했거나 설사 만들었다 하더라도 실패했던 것 같다. 시대를 앞서가시던 감독님.. 혹시 아직 영화판에 계십니까? 어디서든 건강하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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