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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81년 연애 실패기

81년 봄, 작은 누나가 자기 후배중에 괜찮은 애 하날 찍어뒀는데 날 잡아서 그 아이를 소개해 준다고 한다. 그 아이가 일대일로 소개받는 것은 어색해서 싫다고 해서, 미팅의 구색을 갖추기로 했으니 남자쪽도 세명을 맞추랜다. 그러고마고 했다. 시간과 장소가 잡혔다.

집구석에서 놀이에 열중하다가 미팅장소에 무려 삼십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종로의 어떤 곳, 길 앞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남주형(당시 누나의 남자친구, 훗날 기어이 매형이 되었다)이 나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맞아 죽을 것 같은 분위기.

‘아무리 철이 없기로.. 이 씨바넘들아.. 소개한 누나생각을 해야지’

우리가 스스로 머리를 박겠다고 했다. 근데 엎드려 뻗치란다. 엉겁결 엎드려 뻗친 자세로(한 여자의 남자친구가 미래의 처남과 그 친구들에게 이런 폭력을 가하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게 신기하다) 일장 욕을 먹고, 주의사항(미팅의 진행방법, 여학생들에게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전해 듣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뒷통수에 한마디가 더 꽂혔다. ‘셱기들 미팅나오면서 하고 나온 꼬라지 보소’
한넘이 츄리링바람이었다. 요즈음 패션의 그 예쁜 츄리닝이 아니라 무르팍 튀어나온 그 츄리닝이다. 나머지 두넘은 60년대 노털 바바리.. 그제서야 우리가 너무 무례한 차림으로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쩌랴. ‘걱정 마십쇼. 이빨로 다 뭉갤 테니까’

화가 나있을 누나의 시선을 슬금슬금 피하고 있는데, 잠깐 나오라는 눈짓이 전해온다.
‘너 뭐 꺼낼래?’ 당시 폼으로 늘 가지고 다니던 만년필이 하나 있었다. ‘이걸로 하지 뭐’ ‘있다가 그거 꺼내 알았지?’ 꼴도 보기 싫을 동생을 그래도 챙겨준다. 누나 고맙다.

여학생들과 나란히 마주보고 앉았다. 남자들로부터 ‘30분 기다림’이라는 수모를 당한 여학생들의 표정이 밝을 리가 없다. 상당히 미안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다가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거짓말을 했다. 남주형이 그렇게 시켰다.

한번 들러보고 누나가 내게 소개시켜 주려는 여학생이 누군지 바로 알겠다. 좀 비슷한 애들을 달고 나올 것이지. 이러면 내가 좀 미안하잖아. 아무것도 모르고 들러리로 나온 친구들.

여학생들이 잠시 자리를 뜨고, 그 사이에 한가지씩 물건을 꺼내란다. 혹시 다른 넘이 만년필을 먼저 꺼낼까봐 부리나케 만년필을 내어 놓았다. ‘어? 이 셰이가 웬 만년필?’ 넘들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넘들이 꺼낸 건 다방성냥과 담배. 아차 싶다. 나도 그냥 이쑤시개 같은 걸 내 놓을걸 그랬나 보다. ‘맨날 갖고 다니던 건데 뭐’ ‘니가 언제 그걸 갖고 댕겼냐? 이 씨바넘이 오늘 수상하네?’

여학생들이 다시 자리에 오고, 자연스레 누나가 그 여학생에게 먼저 물건을 선택하라고 한다. 짜고 치는 고스톱, 당연히 만년필을 집어든다. 그렇게 각본대로 내 파트너가 된 여학생, 아주 복시럽고 귀엽게 생겼다. 성격도 상당히 솔직하다. 누나가 후배중에 골라 자기 동생 소개시켜 주는 아이이니 오죽하겠노.


토요일에만 두어번 만났을때 쯤, 어느 날 그녀의 기숙사가 있는 춘천으로 내가 가기로 했다.
여대생들의 기숙사 그리고 호반의 도시 춘천.. 뭔가 끈끈한 일이 이루어 질 것 같다.

아침 일찍 춘천행 열차를 탔다. 혼자 여행하는 건 난생 처음이다. 늘 친구들과 시끌벅적 댕겨버릇하다가 여자친구를 만나러 몰래 혼자서 기차를 타고 춘천을 가려니 남사스럽다. 약간 지루하긴 했지만 친구들 몰래 떠난 이 여행 길, 짜릿하기도 하다. 차창 밖 경치를 구경하다 보니 금새 춘천에 도착했다. 강원도라고 해서 굉장히 멀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단 금새 왔다. 여기서 오늘 드디어 뭔가 이루어지는 거다..


택시를 탔다. 명동으로 갑시다.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다. 명동의.. 어? 명동 어디더라..? 아뿔싸.. 약속장소가 어딘지 모르겠다. 이런 미친넘.. 약속장소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무리 머리를 박고 쥐어짜도 약속장소의 이름이 떠오르질 않는다. 어이가 없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새끼가 다 있지?’ 자학을 해도 이미 늦었다.

다행히 약속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 그래서 기숙사로 전활했다. 만나기로 한 장소가 어디냐고 물어봐야 하니까. 그러나 이 아가씨 벌써 나가고 없댄다. 시간이 이렇게나 남았는데 벌써 나갔댄다. 아 참.. 내가 그렇게 보고싶은가.. 

할 수 없다. 일단 명동이란 곳에 가서 간판들을 둘러 보자. 하나씩 보다 보면 ‘ 아 이거였다’ 하는 이름이 떠오르겠지. 춘천의 명동이 넓으면 얼마나 넓겠어.. 그러나 춘천의 명동, 띠바 존나 넓었다. 비슷한 모습의 다방과 경양식집이 즐비하다. 그러나 어쩌랴, 골목 입구부터 천천히 걸으면서 차근히 간판들을 읽어 갔다. 그러나 ‘아 이거였다’ 하면서 떠오르는 게 없다. 

드디어 약속시간이 넘어서고 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시 초입부터 시작해서 전부 다 들락거리자. 끽해야 삼사십군데겠지.. 한집에서 이삼십초씩만 돌고 나오면 늦어도 이십분정도면 어느 집에선가 만날 수 있겠지.


그러나 막상 시작을 하니 예상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 건물마다 지하, 일층, 이층, 삼층.. 간판도 보이지 않던 다방 경양식집이 훨씬 더 많다. 초입에 들어가서 한바퀴 다 도는데 한시간 가까이 걸린 듯하다. 근데 못 만났다. 이상하다.. 여기 말고 골목이 어디 또 있나?
아 띠바.. 저쪽에 또 있다.

저걸 또 다 들락거리려면 한시간은 더 족히 걸릴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서울서 내려왔다지만 그 아이가 약속장소에서 날 두시간을 기다릴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여자가 혼자 기다리는 거 그거 좀 쪽팔리겠나. 아 띠바 날 얼마나 욕하고 있을까..

기숙사로 다시 전활했다. 남아있는 다른 친구 혹시 없냐고.. 그러나 기숙사엔 아무도 없댄다. 허긴 일요일날 기숙사에 남아있을 미친년이 어디 있겠나. 전화를 받은 분께 사정 이야기를 했다. ‘사감 선생님, 오전에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약속장소를 헷갈려서 못 만났다. 내가 한시간 간격으로 전화를 계속 할 테니 혹시 연락이 오거나 본인이 들어오면 이 사정을 좀 알려달라..’ 꼭 그렇게 전해주겠노라고 한다. 사감 아줌만 아주 재미있어 한다.

춘천의 명동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한시간 간격으로 기숙사에 전화를 했다. 이제 교환원도 내 목소리를 안다. 여전히 아무런 연락도 없고, 사람도 들어오지 않았댄다. 이 띠바뇬이 도대체 어딜 하루종일 돌아댕기고 있는거야? 다리도 아프고 짜증도 난다. 그러나 내 잘못인 걸 어쩌랴. 하여튼 내가 춘천에 제시간에 왔었다는 건 알려는 주고 가야 두고두고 욕을 안 먹는다.

드디어 시간이 흘러 학생들이 기숙사로 들어와야 하는 저녁시간이 되었다. 전화를 했다. 교환원이 먼저 반갑게 호들갑을 떨며 얘기해 준다. ‘그 학생 들어왔대요 호호..’ 기숙사 직원들도 전부 다 알게 되었나 보다. 나중에 얘 좀 쪽팔리겠다. 곧 사감 아줌마가 전활 받았다. ‘원래 이 시간 이후엔 다시 못 나가는데.. 학생 정성을 생각해서 내 다시 내보내 줄테니 거기서 꼼짝말고 기다리고 있어요. 재밌게 시간 보내다가 시간 맞춰서 돌려 보내세요.’

드디어 나타났다. 하루 왼종일 기다려서야 겨우 만난 그녀다. 둘이 동시에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예요?’

사건의 정황은 이랬다. 약속시간에 내가 나타나지 않고.. 그녀는 거기서 삼십분 정도 더 기다리고.. 날 몰래 본다고 따로 앉아있던 그녀의 친구들이 말하길,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온 사람이 시간에 늦을 리는 없고, 틀림없이 장소를 잘못 알고 다른 곳에서 널 기다리고 있는 것 같으니 우리가 찾아 나서자..’ 그래서 이곳저곳 찾아다니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내가 없자 그제부턴 친구들이 ‘바람맞은 그녀’ 기분을 풀어준답시고 다른 곳으로 데리고 다녔단다. 그래서 하루종일 춘천 거리를 돌아댕기고, 같은 그 시간에 나는 명동거리만 부지런히 들락날락. 그녀는 그녀대로 부에가 치밀고, 나는 나대로 지치고. 휴대폰이나 삐삐가 없던 시절에만 일어날 수 있었던 쑈였다.

‘친구들한테 창피해서 혼났어요. 자랑할려고 친구들 다들 같이 나왔는데 안 나타나서..’
그랬겠지. 근데 너 이제 기숙사에서 스타됐을거다. ㅋㅋ 점심도 거르고 하루종일 자길 찾아 헤맸을 내가 불쌍했는지 자기가 사겠다며 저녁을 사 준다. 저녁값도 굳었다. 이디오피아에 잠깐 갔었던가 아니던가.. 벌써 떠날 시간이 되었다. 춘천 기차역으로 간다.


'남자는 기차를 타고 떠나고 여자는 뒤에 남고..' 영화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장면이 펼쳐지겠다. 그러나 역앞에서 날 내려주고 그녀는 시간이 급하다며 그 택시를 타고 그냥 들어가 버렸다. 기차 시간까지 멀뚱멀뚱 기차역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영화의 한 장면은 없었다.

그 날 일 덕분에 나와 그녀는 훨씬 가까워졌다. 할 얘기도 많아지고 웃을 일도 많아졌다.
'니네 아주 잘 되려고 그런 재밌는 일도 있나부다' 누나도 재밌어 했다.

친구 한넘에게 그녀가 밉보이기 시작했다. ‘사내자식이 친구를 두고 기집애한테 빠져서야 되겠냐..’ 그넘이 기어코 그녀와 만나는 곳에 따라 나왔다. 그넘이 어떤 행동에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넘에게 자존심이 크게 상한 그녀가 참다 참다 내뱉었다. ‘알았어요. 안 만나면 되잖아요’

그리곤 진짜 총총히 가버렸다. 뛰어가서 잡았지만 뿌리친다. 잠시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녀가 돌아본다. ‘무거우니까 이거 좀 들어’ 들고 있던 두툼한 책 여러권을 내민다. 속으로 빙긋이 웃었다. ‘다행이다. 나한테까지 화 난건 아니구나.. 역시 얘 귀여워’ 그러나 웬걸 정류장 앞에서 책을 다시 건네받은 그녀가 다시 싸늘한 표정으로 말한다. ‘친구가 저러는 걸 가만히 놔두고 있었다는 건 너도 같은 생각이란거야. 니네 둘이서 날 가지고 놀았어. 굉장히 기분 나빠. 그만 만나. 연락 하지마’ 그리곤 버스에 휙 올랐다. 

머 이런 일가지고 저러나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끝난 것으로 생각했는데 주변에선 그게 아니란다. 여자가 남자 길들이려고 그러는 것이니 잠깐 저러다 말테니 계속 대시하랜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방학이라 서울 집에 있었다. 몇번 전화하고 만나서 사과하고 다시 만나는 거지 뭐. 근데 잘 안 된다. 철저하게 전화를 따돌린다. 몇달 세월이 지나자 그집 어머니가 결국 날 조심스레 타이른다. ‘학생, 우리 딸 아무래도 아닌거 같으니까 전화 그만 해요. 알았죠?’ 아 망신.

얘길 들은 친구들의 결론.. ‘걔가 너한테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깐 일로 이러겠냐? 너 완전히 채인거다’ 그런건가? 자존심이 좀 상한다. 산통 깨트린 장본인 넘도 한마디 한다. ‘이깟일로 이 지랄하는 년을 앞으로 계속 사귄다고 생각해봐라. 천만다행이지. 넌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돼’ 그래 이말이 아주 위안이 된다. 니말이 맞다.


한참 지난 어느 한 날, 드디어 그녈 다시 만났다. 오랜만에 전화한걸 그녀가 직접 받았던 거다.
‘할 얘기가 뭐야? 바쁘니까 짧게 얘기 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재촉한다.
‘왜 누가 기다려?’ 한껏 공손하게 물었다.
‘저 쪽에서 남자친구가 기다려. 용건 빨리 얘기 해’
‘이 안에 같이 있단 말이냐? 어디 있는데?’ 아 이뇬 보기보다 잔인하다.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다니.. 안을 둘러보니 어떤 넘 하나가 멀리서 이쪽을 보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다. 저 놈이구나.. 

빨리 후다닥 마음을 정리 하지 않으면 망신만 더 당하겠다. 그래. 연애는 저런 얌생이 같은 쉐이들이나 하는 거야. 싸나이들이 쪽팔리게 무슨 연애냐..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남자친구 달고 나온 뇬에게 무슨 말을 하리. 준비했던 말 하나도 안하고 그냥 일어서기로 했다. 

일어나자는데 싫댄다. 자기가 먼저 일어서서 갈테니 난 조금 있다가 나중에 일어서랜다. 아 띠바뇬, 마지막까지 한번 더 날 무력하게 만든다. ‘그래 그럼.. 차값은 내가 내께’ 했다. 그랬더니 ‘당연히 니가 내지 그럼 내가 내랴?’ 하는 표정을 짓는다. 지 남자친구쪽으로 가는 그녀의 뒷모습 보기가 상당히 괴롭다. 고개를 돌렸다. 아 요팡.. 이게 무슨 꼴인고..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던 당구장으로 갔다.
‘어? 저새끼 생각보다 무지 일찍 왔네?’ 모두들 낄낄댄다. ‘표정에 써 있구만.. 야 요 껨만 끝내고 술이나 마시러 가자 ㅋㅋ’ 그렇게 술마시고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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