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년도 즈음의 어린이날, 우리나라 놀이공원의 시조인 ‘어린이 대공원’이 당시 박통을 모시고 성황리에 개장했다. 나도 그 역사적인 개장식에 참석했었다. 임금님을 직접 실물로 보려고 까치발을 들고 깡총깡총 뛰어봤지만 박통은 깨알만한 점이었다.
온갖 재롱을 눈물겹게 부려봐야 일년에 한번 갈까말까하던 그 어린이 대공원. 대공원에 갈때는 천원을 가지고 갔었다. 십원이면 떡볶이 다섯개를 사먹고, 십원에 하루종일 공짜인 엽기 만화방도 있었고, 일주일 용돈이 기껏 백원정도이던 시절이다. 천원이면 놀이동산 놀이기구 다 타고, 팔각정에서 함박스텍 점심까지 먹을 수 있는 거금이었다. 지금 느낌으로 비교를 하자면 한 삼십만원정도의 풍족감. 그간 원화 감각을 잃었으므로 이곳 돈으로 따지면 한 오백불정도의 안심감.
석관동에서 버스를 타고 중간에 가르쳐 준 곳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좁디 좁은 길을 한참 가다 (면목동 길) 그 좁은 길을 벗어나 갑자기 대로로 나오면 어린이대공원 정문이 나타났다. 소재지가 정확히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으나 처음 가보는 동네였다. 개장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설프게 꾸며져 있었지만 그 전엔 한번도 그렇게 큰 공원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대공원은 그 넓음만으로도 놀라움이었다. 창경원하고는 확실히 틀리다.. 박통 눈 속임으로 뿌려졌던 녹색의 가루들은 없어지고 진짜 잔디들이 덮혀 있었다. 당시엔 그런 넓은 잔디밭을 보기가 굉장히 어려웠는데 새로 개장한 대공원엔 여기저기 너른 잔디밭이 있었다.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가 있었지만 들어가서 뒹굴어봤다.
대공원은 역시 놀이동산이다. 그러나 곧바로 그리로 향하지 않았다. 이곳저곳 시시한 곳들도 괜히 둘러보고 아무 재미도 없는 다람쥐 쳇바퀴에서 시간도 보내고, 그러다가 놀이동산에 들어갔다. 대공원 입장료가 아까워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어보자는 것이기도 했고 맛있는 음식일수록 감춰뒀다가 나중에 먹는 그런 심정이기도 했다.
놀이동산 입장권을 사면 공짜로 탈 수 있는게 몇가지 있었지만 대부분 시시했다. 좀 재미있다 싶은 것은 따로 표를 사야 했다. 놀이동산 최고의 인기는 당연히 우리나라 최초의 롤러코스터, 청룡열차였다. (우리 또래의 사람들은 아직도 모든 롤러코스터를 청룡열차라고 부른다. 디즈니랜드나 식스플랙스의 거대한 롤러코스터도 우리에겐 아직 그대로 청룡열차다.)
표를 사고 길게 줄을 서서 기대감에 조잘대며 차례를 기다리고, 내리는 사람들의 질린 얼굴에 와- 웃고, 열차의 어디쯤에 내가 앉게 될지 앞서있는 사람들 머릿수 계산해 보고, 맨 앞에 앉겠다고 뒷사람들에게 양보도 하고, 순서가 되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열차에 오르고, 안전벨트가 어깨위로 걸쳐지면.. 아 드디어 출발하는구나.. 떡걱 떡걱거리면서 정상까지 올라가던 시간의 가슴터지는 긴장감, 그리고 약간의 무중력 상태 비슷한 게 지나고 나서.. 드디어 열차는 빨려드는 듯이 급강하하기 시작.. 느꼈니? 그 오르가즘.
한번 대공원에 다녀오면 그 후유증에 한두주는 헤매어야만 했다. 그 환희, 그 절정감, 꿈을 꾼 듯 지나간 대공원에서의 서너시간은 한동안 숨막히는 석관국민학교 현실에의 재적응을 힘들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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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초 늦겨울, 그 어린이 대공원엘 갔다. 왜 갔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 추운 겨울에 어린이 대공원엘 갔다. 놀이동산을 후딱 섭렵하고 팔각정에 밥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을까..
네 명의 여학생들 무리를 발견했다. 우리도 넷, 쟤네도 넷이다.. 4:4 다.
꼬시기로 했다. 어떻게 걸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바로 성공했다.
종류가 여럿이지만 그런대로 다들 귀엽다.
옷 매무새나 행동거지를 보면 턱 안다.. 얘덜 양아치 아니다.
틀림없이 공부 잘하는 순진한 애들이다.
근데.. 중3 이랜다. 씨바.. 명성여중 3학년.
그 시절에 2년 차이는 컸다. 명색이 고등학생인데 저런 어린애들을 데리고 놀아야 하느냐 마느냐, 저런 어린애덜과 과연 지성적인 대화가 가능할까..
그러나 사회의 통념을 일단 묻어 보기로 했다. 애덜이 나이보다는 성숙해 뵈잖아? 여자들이 원래 성장이 빨라서 사실은 저런애들하고 우리하고가 딱 맞는거야.. 암 암 그렇고 말고.
뭐하고 놀았는지 기억은 없다. 눈이 무지막지하게 내리던 날(일생를 통틀어도 손가락에 들만큼 눈이 많이 왔었다)인천 월미도에 갔었고, 종로 어디에선가 만나서 놀았고..
친구끼리 모여있으니 여자아이들이 상당히 솔직하다.
‘그 전까지는요.. 절에 나오는 오빠들이 제일 멋있는 줄 알았는데요.. 오빠들 만난 다음부턴 그 오빠들이 시시해 졌어요..’ 까르르르…
아 뿌듯하다. 그 말을 들은 네명 오빠들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모른다. 중학교 3학년 아이들 얘기지만 기분은 좋다. 남자들의 진가를 알아보는 귀엽고 깜찍한 것들..
그리곤 역시 끊겼다. 신분차이를 극복하긴 어려웠다.
얼마가 지난 어느 날, 집으로 전화 한통이 왔다. 누군가 했더니 그 여학생중의 한명이다.
‘근데 내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니?’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부에 나와있는 윤씨들 중 흑석동 주소, 지금 차례대로 다 전화하던 중이예요’
석관동 이씨, 석관동 고씨, 석관동 정씨보다는 흑석동 윤씨가 훨씬 찾기가 빠르다고 생각했더래나, 아무튼 이거 보통 정성이 아니다. 근데 더 놀란 건..
‘우리 지금 중대 앞이예요’
중대앞이라고 해도 어디 어린 학생들이 갈만한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갈만한 데가 있어도 돈도 없고, 그렇다고 집으로 오라고 할 수도 없고.. 다행히 집엔 지금 아무도 없지만.. 그냥 집으로 오라고 할까 말까.. 그나저나 이거 나 혼자서 여자아이 네명을 어찌 감당하나.. 시간 때울 방법이 달리 없었다. 집으로 데려왔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올 수 있냐? 석관동에서 갑자기 올 수 있을 턱이 없다. 니가 혼자서 알아서 해.. 평생 여자애들하고 집구석에서 놀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답답했다. 이거 뭐하고 놀지? 어떻게 뭘 대접해야 하지?
다행히 아이들이 전부 음악을 좋아한댄다. 방안에 기타를 보더니 ‘와 오빠 기타도 치세요?’바로 기타를 잡았다. 이걸로 시간을 때우면 되겠구나. 당시에 산울림의 동요집이 나왔었다.자연스럽게 그 산울림의 동요를 불렀다. 혼자 연습할 때는 몰랐는데 여자애들 앞에서 하다 보니 가사가 새삼 전부 웃기고 아동스럽다. 역시 동요다. 아무리 폼 잡아봐야 분위기가 따라주질 않는다. 땀이 좀 나는거 같다. 씨바 노래를 잘못 택했다.. 그러나 다행히 아이들은 말끄러미 빠져있는 것 같다. 다행이다.
그 아이들을 보내고 그리곤 또 끊어졌다. 고등학생과 중학생의 엄연한 ‘신분차이’는 역시 극복하기 힘든 벽이었나 보다. 여자로 보였어야 하는데, 그저 아이들로만 보였으니. 겨우 2년차에.
지금은 마흔 초중반의 중년의 여인네들이 되어가고 있겠지만, 내가 이렇게 기억하고 있듯, 이 아이들도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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