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얘기

가슴 저미던 노래 '이 세상 어딘가에'

‘100억불 수출, 1인당 국민소득 1천불 달성’이라는 구호가 있던 때가 있었다. 티비 뉴스엔 작업복 차림으로 생산현장을 찾아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 자주 나왔고, 구로공단의 건강한 여공들이 밝은 모습으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들이 나오고 있었다. 전 국민이 이렇게 일치단결하여 열심히 하고 있으니 우리나라도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장사 하던 분을 찾아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아랫층에 가게가 있고 살림집은 윗층 허름한 아파트에 있었는데, 그 윗층 아파트로 가다가 난생 처음으로 ‘작은 공장’들을 직접 봤다. 충격을 받았다. 티비에서 보던 공장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숨막히도록 좁은 공간을 아래위 2층으로 나누어 빼곡하게 미싱들이 있고 그 앞에 촘촘히 앉아 미싱을 돌리는 여공들, 그들이 일어나면 허리를 거의 90도로 숙여야만 할 것 같았다.

어린 내가 보아도 그곳은 도저히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좁은 상자에 갇혀 신음하는 병든 닭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열린 문으로 본 것이니 그 안의 공기를 직접 마셔보지는 않았지만 복도에까지 흘러나오는 퀘퀘한 악취는 그 안의 공기가 얼마나 나쁜지 짐작하고 남았다. 그곳의 모든 공장들이 다 이런 모습이라고 했다. 이렇게 끔찍한 곳에서 하루 열두시간씩 일한다고 했다. 한여름에는 지옥이 따로 없다고 했다.

어렵게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가슴에서 잘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모두 잊었다. 또래 친구들이 그러했듯 나도 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를 동경하며 살았다.



동일방직 사건이란 게 있었다. 여공들이 속옷 차림으로 버티다가 매를 맞고 끌려 나오고, 그들에게 똥물을 끼얹고.. 뒤에서 빨갱이들이 조종하고 있는 거라 사람들이 말했었다. 그렇지만 평화시장의 공장 사람들을 떠올린 나는 그 여공들이 불쌍했다.

[동일방직 사건은 60년대 말부터 의식화되기 시작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어용노조 추방운동의 하나이다. 섬유노조 동일방직 지부는 1972년 5월 10일에 정기대의원회에서 어용지부장을 추방하고 주길자를 지부장으로 하는 새 집행부를 구성하면서 노조민주화의 일보를 시작했다. 회사측은 노조를 회사측에 유리하도록 재구성하는 시도를 하였는데 1976년 7월 23일에 노조간부들을 경찰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고 나머지 노동자들은 기숙사 문에 못질을 하여 가두어 둔채, 회사측 대의원 24명을 모아 대의원대회를 열고 고두영을 지부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에 분개한 노동자 200여명은 노조사무실에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 3일째인 25일에 기동경찰이 농성 중인 여공 400여명을 포위하고 해산하지 않으면 모두 연행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은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속내의 차림으로 저항하였다. 아무리 경찰일지라도 설마 반나체의 여자 몸에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경찰은 경찰봉으로 알몸의 여성노동자를 후려갈기고 구둣발로 짓밟으며 연행했다. 이 사태로 72명이 연행되고, 40여명이 졸도했으며 14명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정신착란 증세로 5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1976년에 어용 김영태가 신임 섬유노조 위원장에 당선되고 1978년에 섬유노조 규약을 개정하면서 소속 노조에 대한 중앙의 지배력을 절대적으로 강화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동일 방직 노조와 상부 섬유노조의 대결을 불가피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일방직 노조집행부는 1978년 2월 21일에 새 대의원을 선출한다는 공고를 붙였는데 2월 20일에 남자공원 10여명이 노조사무실로 들이닥쳐 투표함을 부수고 노조간부를 폭행하였다. 노조간부들이 노조사무실에서 철야하고 있던 중 21일 새벽 5시 40분경 회사측 조종을 받은 남자 노동자 5~6명이 방화수통에 ‘똥’을 담아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선거하러 오는 여성조합원들에게 닥치는 대로 똥을 발랐다.


전국섬유노조는 3월 6일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지부로 처리해 버리고 이총각 지부장과 부지부장 2인, 총무부장 등 4명을 ‘도시산업선교회와 관련이 있는 반조직행위자’라는 이유로 제명했다. 노동자들은 명동성당과 인천답동성당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에 종교계 등 민주세력이 지원에 나섰다. 김수환 추기경을 필두로 한 종교지도자들이 정부당국과 접촉하여 협상한 결과 단식농성은 풀었지만 협상안은 회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고 노조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회사측은 노동자들이 무단결근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해고예고 예외인정신청’을 중앙노동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이 신청을 ‘이유 있다’고 인정하여 4월 1일로 124명에 대한 해고통보를 하기에 이른다. 전국섬유노조본부는 4월 10일에 이들 124명의 해고자 명단을 전국의 각 사업장으로 보내 해고자들이 다른 공장에 취업하는 길조차 막아버렸다. 이것이 그 악명 높은 블랙리스트였다.]


국가가 앞장섰던 고도성장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노동문제가 잉태되었고, 빈익빈 부익부라는 소득분배구조가 정착 되었다. 이러한 왜곡된 구조하에 희생을 감수하던 노동자들의 분노가 분출된 사건이 바로 동일방직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이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무도 일선 노동자들의 이런 열악한 노동현실을 바로 알지 못했다.


이때 김민기가 이 '동일방직 사건'을 계기로 암울했던 우리나라의 노동현실을 음악과 극의 형태로 구성하여 고발한다. 그게 바로 ‘공장의 불빛’이다. '노래굿'이라는 모습을 빌어 ‘노동의 착취’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이 ‘공장의 불빛’은 1978년 어느 스튜디오(송창식의 녹음실이라고 함)에서 창문을 모두 막은 채 카셋트 테잎에 녹음되어 1979년에 배포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본에서 몇번째 복사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알아듣기 조차 힘들 정도의 조악한 음질로 하나 있다. 10월이 되면 병처럼 도지는 ‘그 해 가을 자전거여행’이 또 떠 오르고, 그 여행을 같이 했었던 종혁이가 떠 오르고, 그 친구를 생각하니 그가 눈을 감고 부르던 노래 ‘이 세상 어딘가에’가 떠 올랐다.

세월도 흐르고 생각도 엷어지고..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이 노래가 그저 아름다운 노래로, 친구를 기억나게 하는 노래로만 다가오는 게 참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