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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DMZ 화공작전, 그 무서운 아름다움

내겐 불에 대한 기억이 많은데.. 그중의 하나.
비무장 지대에선 늦은 가을에 ‘화공작전’이란 걸 한다. 비무장지대 그 넓은 지역의 마른 갈대숲과 목초들을 깡그리 태워버리는 일인데, 아마 시야확보를 위해 그리 하는 것 같았다.


그 화공작전 첫 날, 바람의 방향을 보고 한쪽 갈대숲에 불을 붙이고 우린 그 바람의 반대방향으로 이동했다. 불만 붙이려 들어갔던 게 아니라 다른 작업을 하러 들어간 김에 불을 붙이는 스케쥴이었기 때문이다. 한 지역에서 늘 하듯 '박살띠'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놈이 소릴 질렀다. '불길이 이쪽으로 옵니다아아' 그랬었다. 거센 불길이 우리들 쪽으로 오고 있었다.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바뀐모양이다. 아무리 바람이 바뀌었기로소니 반대방향으로 번져가던 불길이 도대체 중간의 빈 공간을 어떻게 뛰어넘어 왔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길은 우리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노루 고라니 멧돼지 토끼들이 미친듯이 뛰어 도망간다. 잘하면 불에 타죽은 거 줏어 먹을 수도 있겠다라는 한가로운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선임하사의 날카로운 고함이 들렸다. ‘전부 타 죽는다. 이쪽으로 튀어’

사실 선임하사가 좀 오바한다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그때 불길은 우리로부터 꽤 먼곳, 어림잡아 1킬로는 멀리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게 우리한테까지 오려면 적어도 십분은 걸릴텐데.. 그러나 우리쪽으로 날아오는 연기의 속도가 꽤 빠르게 느껴졌으므로 일단 잽싸게 뛰었다. 불길의 반대 방향으로 뛰어 안전한 곳을 찾아야만 했는데, 비무장지대의 길이란 게 좁디 좁은 외길들 뿐, 우리가 가려는 방향으로 길이 이어져 주질 않았다. 

갑자기 앞장 선 선임하사가 길을 벗어나 뛰기 시작했다. ‘아 띠바 지뢰 밟으면 어떡할려구..’ 그 와중에도 가능하면 앞에 뛰는 넘이 밟았던 곳을 골라서 짚었다. 그렇게 뛰어 도착한 곳은 주변에 온통 돌이 박혀있는 구릉지대, 그곳의 한 복판에 자리를 잡고 불길쪽을 돌아본 우린 깜짝 놀랐다. 어느새 불길은 돌밭 앞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었다. 불이 뭐 이렇게 빨라? 우리가 이삼백미터 뛰는 동안 불길은 1킬로정도를 날아온 셈이다. 눈 깜짝할 새에 불길은 우리가 있던 돌밭을 좌우로 감싸고 우리들은 그 불길에 사방으로 갇히는 참혹한 일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입체적’ 열기라는 걸 경험했다. 어느 방향으로 얼굴을 돌려도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익히고 숨을 막히게 하는 무시무시한 경험.

직접적인 불길과는 수십미터 떨어져 있음에도 돌밭 여기저기의 잡초들까지 불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다. 이거 뭐야? 돌밭 한가운데 이게 왜 불이 붙지? 바람을 타고 작은 불똥들이 날아와 바짝 마른 잡초들을 태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입고 있던 방탄조끼의 외피 나일론도 그 불꽃의 공격으로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띠바 이거 진짜 장난 아니다. 잠시였지만 생명의 위협이라는 것도 느꼈다.

그때 옆으로 토끼 한마리가 뛰어갔다.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뛰다 질식해 쓰러졌거나 굴로 숨은 모양이다.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불길은 토끼의 뜀박질로도 피해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물며 토끼의 뜀박질로도 불길에서 도망치지 못하는데.. 만약 우리가 갈대밭 한 복판이라 우리 주변에 이 돌밭이 없었더라면.. 골때릴뻔 했다. 아 우리 선임하사님. 거룩 거룩.

드디어 불길이 우리를 넘어 지나갔다. 매캐한 연기가 아직 뒤덮은 그곳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아까 토끼 한마리가 굴로 들어간거 봤다. 그거 꺼내 먹자.. 다 익었을 테니 바로 먹을 수 있을거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게 불과 몇분전이라고.. 우린 깡그리 잊고 그리로 몰려갔다. '토끼가 구우면 맛있거덩..' 굴이 있긴 있었는데 굴이 깊어 토끼는 못 찾았다. 선임하사의 혀차는 소리..
‘이 또라이 섹히들아 지금 토끼먹을 생각이 나냐? 뒈질뻔한 놈들이.. 참 단순한 대가리하고는’
그래서 군대다. 대가리가 단순해 지지 않으면 군대생활 어찌 하겠노.

이제 도로 나가야 한다. 근데 재가 온통 덮여 어디가 길인지 명확치 않다. 불길이 휩쓸땐 오히려 담담하더니 길이 잘 보이질 않으니 이건 좀 불안하다. 노루인지 고라니인지 불에 탄 짐승의 시체 하나가 길 근처에 있었다. ‘선임하사님 저거 줏어가면 안됩니까?’ ‘자신있으면 누가 가서 줏어와라’ 물론 아무도 안 갔다. 아깐 불을 피해 미친듯이 뛰었지만 제 정신이 돌아온 지금, 어디가 지뢰밭인지도 모르는데 고기 한점 먹자고 거길 들어가는 놈은 없었다. 두고 오기가 아까웠지만 ‘겉에만 탔을거기 때문에 어차피 바로 먹을 수도 없어’ 그렇게 위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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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었다. '화공작전' 때문에 모든 매복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내무반안은 북적였다. 그때 왕고참이 어딜 갔다왔는지 상기된 얼굴로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야 니들도 차례대로 올라가서 구경하고 와라. 평생 볼까말까한 장관이다.’ 순서가 되어 나도 고지 꼭대기 화기소대 옆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비무장지대쪽을 내려다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다가 탄성이 터져 나온다. 사진기가 없어 찍어두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그 엄청난 장면, 불바다- 한밤중 산위에서 내려다 본 전 시야를 불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걸 어찌 표현해야 할까..그 흔한 '불바다'말고는 다른 표현이 없다. 불바다. 불의 바다. 

그전까지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를 볼때에도 그걸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때엔 그 불바다의 장관을 머리속에 꾸겨넣고 있었다. 평생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 일생일대의 장관.. 그래서 그때 그렇게 꾸겨넣은 덕인지 그 불바다의 광경은 장면뿐 아니라 그때의 느낌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뭐랄까 지옥의 불구덩이를 멀리서 내려다보는, 그래서 내가 그곳에 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싶던 안도감.. 낮에 당했던 그 무서운 불길의 공포는 간데 없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자연의 위용에 경외감이 들면서 울컥 경건해지던 그 이상스런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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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남쪽에 초대형 산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근래 들어 가뭄이 점점 심해지면서 산불의 빈도와 규모도 점점 커지고 있다. 재작년보다 작년이 더 심했고, 작년보단 올해가 더 심하다. 자연재해는 기후변화의 모습으로만 오는게 아닌듯 싶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쳐서 자연 발화했을 리는 없고 틀림없이 인간들의 부주의나 나쁜 의도로 인해 발생했을 터.

부자들이 사는 말리부 해안가의 집들이 타는 건 솔직히 고소하지만, 이 가뭄에 어렵게 버티며 자란 관목 숲이 불타 없어지는 건 참 안타깝다. 숲이 사라진 곳엔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는 곳엔 인간도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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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거창한 걱정도 잠시. 저녁 뉴스에 비친 산불현장의 모습을 보면서 난 어이없게도 1983년 늦가을 철원 비무장 지대에서의 그 느낌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옥의 불구덩이를 멀리서 내려다보는, 그래서 내가 그곳에 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싶던 안도감.. 무서운 불길의 공포는 간데 없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자연의 위용에 경외감이 들면서 울컥 경건해지던 그 이상스런 경험. 

혹시.. 니네 땅, 니네 산 타거나 말거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