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반 정신교육. 중대장이 하기도 하고 소대장들이 돌아가면서 하기도 했었는데 누가 하든 지루했다. 대부분 '정의사회 구현'을 말하는 정권홍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교육하는 장교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코를 골거나, 자다가 옆으로 쓰러지지 않는 한 웬만한 졸기는 봐줬다. 꼭 중간에 음담패설로 변했다가 끝날 무렵 다시 교육목표 결론만 읽어주던 정신교육.
하루는 교육중인 소대장 하나에게 말년 하나가 물어봤다.
‘이런 거 말고 좀 재미난 거 하면 안됨껴? ㅋㅋ’
‘재미없는 거 나도 안다 씹때꺄. 누군 하고 싶어서 하냐? 윗놈한테 잘 뵈려고 악쓰는 돌대가리 새끼가 하라니까 하는거지’
돌대가리가 꼭 중대장을 칭하는듯 해서 잠시 내무반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오해하지마라. 우리 중대장님을 말한게 아니라 국방부에 있는 높은 사람들 얘기다' 소대장이 황급히 사태를 수습하려고 애쓴다. 허긴 중대장을 사병들 앞에서 돌대가리라고 말할 바보 소대장이 어디 있겠나. 계면쩍게 웃던 소대장이 위기를 돌파하려는 듯 주머니속에서 수첩 하나를 꺼낸다. 깨알같이 뭔가 적혀있는데 그게 전부 음담패설이란다. 시간은 때워야하고, 병사들은 거반 졸고.. 그래서 잠도 깨우고 시간도 때울 음담패설 모음집이란다. 분위기가 잠시 썰렁했던 그날, 소대장은 분위기 반전용으로 꺼낸 음담패설들로 아예 끝장을 봤다. 근데 대부분 아는 얘기들.
이 지루한 정신교육에 내가 연관되게 된 일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우리 ‘쎼두’ 중대장이 날 부르더니 ‘중대가’를 하나 만들어서 다음주 정신교육때 중대원들에게 다 가르쳐 주란다. 중대가라 ㅎㅎ 하지만 내가 무슨 수로 일주일만에 군가하날 작곡 작사 한단 말인가. 그러나 알겠다고 했다. ‘이팔장’의 단가 (이것도 사실은 어느 국민학교의 교가가 원곡이라고 했었다)에 가사만 새로 붙이면 된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햇살이 밝아오는 동녘 하늘에~” 로 시작하던 이팔장 단가를 군대냄새가 팍팍나는 가사로 고쳤다. "조국의 부름받아~" 어쩌고 저쩌고 했었던 것 같다. 그 다음주 진짜로 나는 중대장도 앉혀놓고 중대원들에게 그 ‘표절 군가’를 가르쳤고 중대원들은 재밌게 그 노래를 배웠다.
마음에 들었는지 그 이후에도 몇번 중대장은 내게 색다른 주제의 정신교육을 지시하곤 했었다. (일개 일병이 중대원의 정신교육을 감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내가 우리 중대의 유일한 ‘대재’였기 때문이었다.ㅋ) 잡지책 같은데서 자료를 구해서 했었는데 지금 기억나는 주제로는 성기단련법, 바이오리듬 작성법등 같은 걸 했었다. 당연히 재미 있었을 수 밖에. 근데 이게 대대장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불려간 우리 중대장이 '까불지 말고 지시대로만 정신교육을 실시하라'는 말을 들었는지 쎼두 중대장은 '대대장님 지시사항'이라며 모든 걸 원위치로 되돌렸다. 다시 되돌아간 따분한 정신교육.
이렇게 날 몇번 써먹었던 중대장이 하루는 내게 책자 몇권을 던져주면서 그걸 읽고 내일까지 요약해서 달란다. 다행히 똑같은 거 네권이었는데 책자의 제목은 ‘선진조국 창조 제 1호’ 였다. 내가 책의 제목을 아직 기억하는 건 그때 그 책의 내용이 너무나 놀라웠었기 때문이다. 그 책엔 이런 내용들이 가득했었다.
[전두환대통령이 대대장 시절 청와대를 지키던 때, 하루는 병사들을 갑자기 모두 집합시켜 놓고 ‘오늘밤 무장간첩단이 나타날 수 있으니 모두들 경계를 철저히 하라’ 라고 지시했다. 근데 그날 밤 진짜로 청와대 뒷산까지 무장간첩 김신조일당이 침투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것을 미리 예측한 전두환 대통령의 통찰력과 예지력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무사했고 그 무장 간첩단을 일망타진 할 수 있었다. ]
[전두환 대통령이 사단장 시절 서해안도 관할이었는데, 하루는 해안 초병부대를 갑자기 시찰하시어 ‘오늘 밤 간첩선이 나타날 수 있으니 경계에 만전을 기하라’ 고 하셨다. 근데 그날 밤 진짜로 서해로 북한 간첩선이 침투했는데 다행히 그것을 미리 예지한 전두환 대통령 때문에 피해 없이 초기에 진압할 수 있었다.]
?? 위대한 수령 김일성. 전지전능 여호와 하나님 ??
1960년대의 국민학교 어린이들도 믿지 않았을 이런 내용이 1980년대 초 국방부가 발간한 책자에 버젓이 실려있었다. 당시의 내무반엔 TV도 없고 민간신문 한장 없었으니 병사들의 눈과 귀가 막혀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군인들을 얼마나 졸로 봤길래 어찌 이런 찬양을 병사들이 믿을거라고 생각했을까? 책 뒷부분의 결론은 이랬다.
[비범한 통찰력과 예지력을 가지신 전두환대통령을 믿고 따르면 선진조국의 창조는 이루어진다.]
믿기지 않는 이런 내용을 담은 이 골때린 책자.. 훗날 틀림없이 재밌는 가치를 가질 것 같았다. 그래서 하나를 꼬부쳤다. 그러나 담날 바로 뺏겼다. 대대 교육관이 직접 와서 그 책들을 전량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오죽 중요하고 급했으면 교육관이 직접 부수를 세어 회수해 갔을꼬. 그 스토리는 뻔했다.
어떤 돌대가리 장성놈 하나가 전두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각하 기분 좋으실 내용’으로 책을 하나 발간하라고 했을것이다. 그 책이 쓰여지고 편집되어 인쇄된 것을 보고 딴에는 ‘아주 잘 된 책’이라고 만족하며 그것을 일선부대에까지 배포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의 내용을 나중에 확인한 다른 사람이 화들짝 놀라 ‘이새끼 미쳤냐. 이런 내용을 믿을 사람이 요즘세상에 어디있냐. 이건 각하를 위한 게 아니라 각하를 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다’ 해서 부랴부랴 회수지시가 내려졌을 것이다. 한권이라도 유출되면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니 한부도 빠짐없이 회수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을 것이고, 그래서 그 게을러 터진 교육관(소령)이 직접 중대를 찾아가 부수를 확인하고 회수해갔을 것이다.
전두환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었던 그 골때린 책자는 그렇게 사라졌다. 나중에 몇놈에게 그 책의 이야길 했다. 그런 책이 하룻동안 있었었고 그 책의 내용은 이러저러했었다고.. 하지만 내 말을 믿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띠바야 니가 잘못 본거지 그게 말이 되냐?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그런 책을 찍었겠냐’
허긴 그 말을 누가 믿겠노? 유치원생들이나 믿을 ‘전설의 위인기’ 책자가 실제로 군대에 배포되어 하룻동안 존재했었었다는 걸 누가 믿겠나 말이다. 나래도 안 믿을텐데. 이 거짓말 같은 ‘선진조국창조’ 책자는 이렇게 딱 하룻동안 존재하고 사라졌었다.
그로부터 이십몇년 후.. 아직까지도 군장병들의 정신교육에 국가시책을 홍보한단다. 세월이 흘러 세상이 바뀌었지만 군바리들의 뇌 구조- 즉 권력에 아부하고 실효성에 관계없이 뭐든 생색부터 내는 그 유치한 뇌 구조는 아직 그대로인 모양이다. 21세기 첨단 정보를 자랑하는 스무살 청년들에게 50년대 반공교육 같은걸 시키면 효과가 있을거라고 보나?
허긴 군바리야 사람들이 안보위협으로 겁을 먹어야 존재할 수 있는 집단이다. 사람들이 건강하지 않아야 의사들이 먹고 살듯이. 그래서 의사는 끊임없이 질병으로 겁을 주고, 군바리들은 끊임없이 안보문제로 겁을 준다. 직업이 걸린 문제이니 군바리들은 이해가 된다. 이해하기 힘든 건 군바리들이 아니라 군바리들의 이런 아이디어를 받아주는 권력이다. 이십몇년 세월을 뒤로 돌아 전통시절로 되돌아가 버린, 이 2mb 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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