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 홍수때문에 고립
엄청난 비로 서울이 물에 잠기고 북한에서 구호품까지 보내오고 그랬던 때, 난 강원도 철원에 있었다. 개울물이 갑자기 불어 사람이 쓸려내려가고 총 잃어버리고.. 그 때 우리 부대 주변도 사람허리 정도의 물이 둘러쌌었다. ‘완전 고립’된 거다.
여러가지 불편한 점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었겠지만, 의외로 우린 그 때 모두 환호성을 질렀었다. 다름아닌 '유격훈련' 때문이었다. 며칠 뒤에 ‘유격훈련’ 스케쥴이 잡혀져 있었는데 홍수로 인해 우리가 유격장에 갈 수가 없게 된거다. 근데 그게 뭐가 기쁘냐고? 비 그치면 다시 갈건데? 아니다. 유격장 사용은 일년일정이 미리 짜여져있기 때문에 한 부대가 훈련을 못하는 경우, 다시 일정을 잡는 게 아니라 그냥 완전히 쏙 빠져버린다.
게다가 다음번(내년) 유격훈련 이전에 제대하는 고참들(나도 포함)은 이제 다시는 유격훈련 받을 일이 없다. 기쁨이 두배.. 비 참 자알 온다.. 모든 일정이 없어졌으니 내무반에서 뒹굴거리기만 하면 된다. 당시 ‘식기 왕고참’을 끝낸 정도였을 난 내무반 생활이 전혀 힘들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 고립을 즐겼다. 재미났다.
전역하는 예비역 팀.. 발이 묶였다. 본인들은 띠바 난리가 났다. 헬기라도 보내야 하는거 아니냐, 국가에 소송을 하느니 국방부를 폭파하느니.. 근데 그거 남의 일이었다. ㅋㅋ 외부로부터의 부식공급이 끊겨 식사가 상당히 허술했지만 버틸만 했다. 하루종일 내무반 교육이 지겨웠지만 까짓거 앞엣놈 등에 기대고 자면 되니까 버틸만 했다. 고립은 마냥 즐거웠다.
하지만 계속 쏟아지는 비로 막사와 식당사이의 작은 개울이 넘쳐버릴 즈음부터 사정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반찬이 엉성해져 가고 있었던 차에 식당 길마저 막히니.. 로프를 걸고 거기에 밥통을 매달아 운반해서 밥을 받아 먹어야 했는데, 거의 춘삼이 식사가 되어버렸다. 재료가 일체 없는 멀건 된장국과 양배추 김치 몇 쪼가리 그리고 짬밥냄새 유난히 더 나는 밥. 이삼일에 한번씩 주는 ‘전투식량(밀봉 포장된)’외엔 먹을만한 게 전혀 없었다. PX도 개울 건너에 있었으니.
먹는 것도 부실한데다 축축한 내무반에서 며칠을 구르다 보니 몸과 마음이 쳐져갔다. 오락시간 음담패설도 하루이틀이지 땀냄새로 역겨운 내무반에 빽빽히 들어앉아 내무교육 받는 것도 버티기 힘들어졌다. 오랫동안 집에 가지 못한 중대장과 선임하사들의 히스테리도 점점 심해지고, 눈치를 보니 쫄따구들 집합도 자꾸만 잦아지는 것 같고. 고립이 이젠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거다.
지난주에 못 나간 전역 예비역들.. 거의 죽음상태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들이 이번 주엔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겠단다. 이미 군 생활 끝났는데 묶여 있었으니 얼마나 지겨웠을까. 이번주엔 가다가 죽더라도 일단 나간단다. 그냥 하는 소리거니 했는데 웬걸 그걸 대대장이 진짜로 허락했댄다. 로프에 매달려 위병소쪽으로 건너가더니 아직 물이 무릎까지 차있는 길을 기어이 헤쳐나간다. 그들이 위병소앞 물속에서 돌아보며 외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린 간다아- 조뺑이들 쳐라아' 가다가 개울(사람 쓸리고 총 빠진 그 개울)을 못 건너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었는데 이 사람들 안 돌아왔다. 죽었다는 소식도 없고. 도대체 그 물살을 어떻게 건너 갔는지 두고두고 미스테리였다.
며칠 후 고립은 풀리고, 홍수로 무너진 곳 보수하느라 한동안 거의 죽었다 살아났다.
그 해 겨울, 고립을 다시 바라다
영하 30도 이하가 예사인 곳, 하루가 멀다하고 눈이 내리는 곳 철원. 군대에선 눈이 쌓인 후 제설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눈이 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제설작업도 같이 한다. 그래서 하루종일 눈이 오는 날은 하루종일 제설작업을 해야한다. 이러니 군바리에게 눈에 대한 애틋한 감동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눈은 그냥 지겨운 '일거리'다.
띠바 제설작업 좀 안하면 어떻게 되길래 이 재랄을 하는 걸까? 하루만 안 치우면 눈이 쌓여 길이 끊겨버린단다. 머? 길이 끊겨? 고립? 한 열흘 탱자탱자 지나가는 그거?
지난 여름 맛본 짤막한 고립이 고새 그리워진 거다. 눈때문에 고립? 홍수때문에 고립되는 거랑은 많이 다를 것 같다. 얼핏 생각하면 낭만적일 것 같기도 하고 아름다울것 같기도 하고. 기분 나쁘게 축축한 것도 아니고 온 세상이 하얀 상태에서 고립.. 그래 이거 괜찮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은 군바리의 상대가 못 되었던 거다. 흐르는 물은 못 막지만 쌓인 눈은 치우면 되니까. 목숨걸고 눈 치우는 군바리들에게 그토록 바라던 겨울 고립은 결국 없었다.
2011년 겨울 강원도 고립
강원도 폭설로 마을들이 고립됐단다. 잠시 철없는 생각에
‘저 사람들 재밌겠다’ 했다.
워낙 눈이 없는 곳에서 오래 살다보니, 잠시 이런 망할놈의 생각을 했다.
미안하다.^^
엄청난 비로 서울이 물에 잠기고 북한에서 구호품까지 보내오고 그랬던 때, 난 강원도 철원에 있었다. 개울물이 갑자기 불어 사람이 쓸려내려가고 총 잃어버리고.. 그 때 우리 부대 주변도 사람허리 정도의 물이 둘러쌌었다. ‘완전 고립’된 거다.
여러가지 불편한 점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었겠지만, 의외로 우린 그 때 모두 환호성을 질렀었다. 다름아닌 '유격훈련' 때문이었다. 며칠 뒤에 ‘유격훈련’ 스케쥴이 잡혀져 있었는데 홍수로 인해 우리가 유격장에 갈 수가 없게 된거다. 근데 그게 뭐가 기쁘냐고? 비 그치면 다시 갈건데? 아니다. 유격장 사용은 일년일정이 미리 짜여져있기 때문에 한 부대가 훈련을 못하는 경우, 다시 일정을 잡는 게 아니라 그냥 완전히 쏙 빠져버린다.
게다가 다음번(내년) 유격훈련 이전에 제대하는 고참들(나도 포함)은 이제 다시는 유격훈련 받을 일이 없다. 기쁨이 두배.. 비 참 자알 온다.. 모든 일정이 없어졌으니 내무반에서 뒹굴거리기만 하면 된다. 당시 ‘식기 왕고참’을 끝낸 정도였을 난 내무반 생활이 전혀 힘들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 고립을 즐겼다. 재미났다.
전역하는 예비역 팀.. 발이 묶였다. 본인들은 띠바 난리가 났다. 헬기라도 보내야 하는거 아니냐, 국가에 소송을 하느니 국방부를 폭파하느니.. 근데 그거 남의 일이었다. ㅋㅋ 외부로부터의 부식공급이 끊겨 식사가 상당히 허술했지만 버틸만 했다. 하루종일 내무반 교육이 지겨웠지만 까짓거 앞엣놈 등에 기대고 자면 되니까 버틸만 했다. 고립은 마냥 즐거웠다.
하지만 계속 쏟아지는 비로 막사와 식당사이의 작은 개울이 넘쳐버릴 즈음부터 사정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반찬이 엉성해져 가고 있었던 차에 식당 길마저 막히니.. 로프를 걸고 거기에 밥통을 매달아 운반해서 밥을 받아 먹어야 했는데, 거의 춘삼이 식사가 되어버렸다. 재료가 일체 없는 멀건 된장국과 양배추 김치 몇 쪼가리 그리고 짬밥냄새 유난히 더 나는 밥. 이삼일에 한번씩 주는 ‘전투식량(밀봉 포장된)’외엔 먹을만한 게 전혀 없었다. PX도 개울 건너에 있었으니.
먹는 것도 부실한데다 축축한 내무반에서 며칠을 구르다 보니 몸과 마음이 쳐져갔다. 오락시간 음담패설도 하루이틀이지 땀냄새로 역겨운 내무반에 빽빽히 들어앉아 내무교육 받는 것도 버티기 힘들어졌다. 오랫동안 집에 가지 못한 중대장과 선임하사들의 히스테리도 점점 심해지고, 눈치를 보니 쫄따구들 집합도 자꾸만 잦아지는 것 같고. 고립이 이젠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거다.
지난주에 못 나간 전역 예비역들.. 거의 죽음상태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들이 이번 주엔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겠단다. 이미 군 생활 끝났는데 묶여 있었으니 얼마나 지겨웠을까. 이번주엔 가다가 죽더라도 일단 나간단다. 그냥 하는 소리거니 했는데 웬걸 그걸 대대장이 진짜로 허락했댄다. 로프에 매달려 위병소쪽으로 건너가더니 아직 물이 무릎까지 차있는 길을 기어이 헤쳐나간다. 그들이 위병소앞 물속에서 돌아보며 외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린 간다아- 조뺑이들 쳐라아' 가다가 개울(사람 쓸리고 총 빠진 그 개울)을 못 건너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었는데 이 사람들 안 돌아왔다. 죽었다는 소식도 없고. 도대체 그 물살을 어떻게 건너 갔는지 두고두고 미스테리였다.
며칠 후 고립은 풀리고, 홍수로 무너진 곳 보수하느라 한동안 거의 죽었다 살아났다.
그 해 겨울, 고립을 다시 바라다
영하 30도 이하가 예사인 곳, 하루가 멀다하고 눈이 내리는 곳 철원. 군대에선 눈이 쌓인 후 제설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눈이 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제설작업도 같이 한다. 그래서 하루종일 눈이 오는 날은 하루종일 제설작업을 해야한다. 이러니 군바리에게 눈에 대한 애틋한 감동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눈은 그냥 지겨운 '일거리'다.
띠바 제설작업 좀 안하면 어떻게 되길래 이 재랄을 하는 걸까? 하루만 안 치우면 눈이 쌓여 길이 끊겨버린단다. 머? 길이 끊겨? 고립? 한 열흘 탱자탱자 지나가는 그거?
지난 여름 맛본 짤막한 고립이 고새 그리워진 거다. 눈때문에 고립? 홍수때문에 고립되는 거랑은 많이 다를 것 같다. 얼핏 생각하면 낭만적일 것 같기도 하고 아름다울것 같기도 하고. 기분 나쁘게 축축한 것도 아니고 온 세상이 하얀 상태에서 고립.. 그래 이거 괜찮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은 군바리의 상대가 못 되었던 거다. 흐르는 물은 못 막지만 쌓인 눈은 치우면 되니까. 목숨걸고 눈 치우는 군바리들에게 그토록 바라던 겨울 고립은 결국 없었다.
2011년 겨울 강원도 고립
강원도 폭설로 마을들이 고립됐단다. 잠시 철없는 생각에
‘저 사람들 재밌겠다’ 했다.
워낙 눈이 없는 곳에서 오래 살다보니, 잠시 이런 망할놈의 생각을 했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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