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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유시민과 도마 (Thomas)


예수와 노무현
부하 장악에 능한 카리스마 보스와 충성심 강한 조직원들만이 힘을 쓰는 곳, 대한민국 정치판이다. 그런 후진 정치의 표상이었던 김대중과 김영삼이 이미 사라졌는데도 이 추악한 전통은 좀처럼 사라지질 않는다. 힘깨나 쓰는 사람이 하나 솟아오르면 그를 따라 합종연횡, 피차 동등한 국회의원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부하 조직원으로 기어들어가 충성을 맹세하고 주구가 되어 움직이는 행태는 아직도 여전하다. 이런 썩어빠진 질서에 처음으로 도전장을 내밀었었던 사람이 바로 노무현이었다.

썩어빠진 유대교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예수처럼 노무현은 썩어 문드러진 한국 정치판과 썩어 문드러진 주류세력에 도전장을 내밀었었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듯, 노무현도 그가 개혁하려 했던 썩은 주류세력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예수가 바라던 세상은 예수의 생전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예수의 열두 제자가 스승 예수가 바라던 세상을 열었다.


예수의 열두제자
예수의 열두제자들은 제각각이었다. 말 잘듣는 베드로도 있었고, 글 잘쓰는 요한과 마태도 있었고, 잔머리 잘 굴리는 유다도 있었고, 영리하고 의심많은 도마도 있었다. 이중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었던 인물은 도마다. 어느 찬송가 가사에서나 나오는 이름 도마, 지금은 사라진 ‘도마복음’의 저자다.

예전에 도마복음을 잠깐 번역하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도마.. 예수의 제자이면서도 ‘스승이었던 예수를 훨씬 뛰어넘는 지혜’를 가졌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느낌. 도마복음에서 보이는 도마는 스승 예수의 말씀을 훨씬 합리적이고 훨씬 차원높게 승화시켜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극강의 지혜를 갖춘 사람이었다. 현대의 '변질된 예수'가 아닌 '진정한 예수'를 후세에 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제자였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리한 도마는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성'이 발 디딜 수 없는 광기의 종교판에서 '지혜로운 도마'는 철저히 견제당하고 외면당하고 버려졌다. 진정한 예수의 가치를 후세에 계승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제자였지만, 주도권 다툼에서 패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고, 결국 심각하게 왜곡된 예수의 모습만 후세에 전달되어 오늘날의 추악한 기독교가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엔 어찌보면 도마의 탓도 있다. 도마에게 무슨 단점이 있었을까? 


노무현의 친노그룹
친노그룹도 모두 제각각일 것이다. 베드로 같은 사람, 요한 같은 사람, 유다 같은 사람, 도마 같은 사람, 모두 제각각일 것이다. 노무현을 따르고 존경했던, 그래서 노무현을 위해 ‘중요한 할일’이 공히 남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한배를 타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는 없다. 열두제자가 그랬듯 이들의 분화는 어찌보면 당연하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들의 내부엔 암투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음이 확연하다. 하지만 자칫 분열의 모습을 보였다간 돌아가신 노대통령께 누가 될까봐, 노대통령을 흠모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지탄을 받을까봐 서로 말을 아끼고 글을 아끼고 있을 뿐, 그들 내부의 분열은 확실해 보인다. 참 궁금했다. 그래서 양정철닷컴에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그 역시 섣불리 대답할 입장이 되지 못함을 알기 때문에 그냥 참기로 했다.


유시민과 도마
친노그룹의 사람들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열두제자와 비교하지 못한다. 하지만 친노그룹중 한 사람은 예수의 제자중 한사람과 아주 쉽게 오버랩된다. 바로 '유시민'과 '도마'다.

유시민.. 지역에 기반을 둔 구태의연한 정치판을 타파하려는 사람, 이는 노무현의 뜻과도 일치하고, 대다수 깨인 국민들이 바라는 바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유시민.. 참 영리하면서도 올곶은 느낌의 사람이다. 아마 실제로도 그러할 것이다. 스승 노무현을 능가하는 지혜와 비전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고, 스승 노무현을 능가하는 올곶은 성품을 지닌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통 큰 예수니까 포용이 가능했던 제자 도마처럼, 통 큰 노무현이 아니었으면 품지 못할 그런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유시민의 예정된 패배
유시민이 정치인생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지난 경기도지사 선거에 이어 김해을 선거에서 연속 두번 자기 뜻대로 후보단일화를 이끌어 냈지만 두번 다 본선에서 패배한 것이다. 책임론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특히 이번 김해을 선거의 패배는 그에게 회복불능의 치명상이 될 공산이 크다. 노무현의 성지라 할 수 있는 곳에서 노무현의 적통자라고 주장하는 그가 주민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구태정치와 부패의 상징 김태호였다는 것도 유시민에겐 아픈 치명타다. 국민들은 죽었던 김태호를 다시 살린 것에 분노하고, 경남이 다시 all 파란빛으로 회귀한 것에 분노한다. 

김해을.. 노무현의 뜻을 따르는 야권단일후보라면 어느 누가 나갔더라도 당선이 확실했던 곳이었다. 그럼에도 선거에서 졌다. 민주당이 은근히 그걸 바랬었기 때문에? 후보가 워낙 빈상에 인지도가 낮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니다. 패배의 원인은 단 한가지다. 생뚱맞았던 그 후보가 바로 '유시민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의 패배는 바로 유시민의 패배이다. 노무현의 후광만 믿고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고집을 부리던 유시민의 몰락이다. 이것이 유시민의 한계라면 한계다. 아마 국민들은 친노그룹 분열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물은 것 같다. 또 창당과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보여진 그의 아집과 독선에 크게 실망한 것 같다.

난 개인적으로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던 암묵적 지지자였다. 하지만 이번 그의 몰락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간 그의 행보는 실망스러웠다. 물론 그것이 언론에 의해 굴절된 '왜곡 행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억울해도 소용없다. 이게 정치인의 숙명이며 이걸 이겨내야 하는게 정치인의 첫번째 과제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번 김해을의 패배가 더 큰 대의를 위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여겨지기까지도 한다. 예수의 민민한 제자들이 하지 못한 걸 뛰어난 사람 ‘사도 바울’이 해냈던 것처럼, 고만고만한 친노그룹보다는 손학규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오히려 훨씬 더 실현가능한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생각도 한다.


유시민은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몰락이 참 가슴 아프다. 썩어 문드러진 한국의 정치판에서 좀처럼 나오기 힘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누가 유시민의 비전을 가졌으며, 그 누가 유시민의 논리를 가졌으며, 그 누가 유시민의 뚝심을 가졌단 말인가. 이렇게 일찍 사라지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사람인 것이다. 또 그의 몰락이 가진 상징성으로 인해 한동안 이땅에 젊은 정치개혁의 꿈이 사그라들고 마는 게 아닌지도 걱정이 된다.

하지만 다행히.. 그의 나이 이제 갓 쉰을 넘어섰다. 다시 일어설 시간이 아직 충분히 있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비로소 알았으니, '자만'이 가장 위험한 적이라는 걸 알았으니, 정치는 긴 호흡으로 해야 한다는 걸 알았으니, 이렇게 여러모로 부족한 것을 두루두루 알았으니, 부디 많이 반성하고, 많이 배우고, 많이 깨닫는 기회로 삼기 바란다.

그는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